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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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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총

조회 4271·댓글 36

시계 위인전이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맨 처음으로 언급해야 할 인물은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시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그 분’, 아브라함-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 1747~1823)입니다. 시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 불리는, 그야말로 ‘올타임 레전드’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단 한 명의 위인이죠. 스위스 뇌샤텔에서 태어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선대의 영향을 받아 유년기 시절부터 일찍이 시계수리 및 워치메이킹에 눈을 떴습니다. 1775년에는 마침내 프랑스 파리 일드라시테(l’Île de la Cité, 시테섬) 부둣가에 케 드 롤로지(Quai de l'Horloge)라는 자신의 공방을 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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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루이 브레게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자신의 터전을 세운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시계사에 선명한 궤적을 남기게 됩니다. 만 33세가 되던 1780년 개발한 최초의 셀프와인딩 시계 퍼페추엘(Perpétuelles)을 시작으로, 1783년 상징적인 '브레게 핸즈'와 독특한 아라비아 숫자 폰트의 '브레게 인덱스', 1786년에는 처음으로 기요셰(Guilloché) 다이얼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시계 디자인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그는 이후 시계의 안정성 및 정확성에 관한 연구를 이어갑니다. 1790년 충격으로부터 밸런스를 보호하는 파라슈트(Pare-chute)를 도입한데 이어, 1798년에는 강한 토크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콘스탄트 포스 이스케이프먼트, 1801년에는 마침내 중력에 의한 오차를 보정하는 투르비용 레귤레이터까지 발명하게 됩니다. 이후 1812년 오프 센터 다이얼의 회중시계, 1815년 마린 크로노미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발명왕이 남긴 업적을 모두 언급하고자 한다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1832년 9월 17일 당시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렇게 스위스 정통 워치메이킹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시계의 아버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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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게를 대표하는 클래식 7317의 모티프가 된 역사적인 회중시계 No.5

 

오늘날 브레게(Breguet)는 위대한 ‘그 분’이 남긴 풍부한 유산과 정신을 계승한 하이엔드 시계제조사입니다. 비록 브레게 가문은 사업에서 손을 뗐지만, 스와치 그룹이 그를 대신해 창립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브랜드를 대표하는 클래식(Classique) 컬렉션을 위시한 대부분의 제품이 위인이 살아 생전 제작한 옛 회중시계로부터 영감을 얻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손길에서 비롯한 고전적인 요소가 여전히 시계 곳곳에서 살아 숨쉽니다. 브레게는 전통적인 이 디자인을 자신의 시그니처로 정의합니다.  

 

기요셰.jpg

 

첫번째 시그니처는 엔진 터닝 다이얼(Engine-Turned Dial)입니다. 엔진 터닝 선반(로즈 엔진)을 이용해 금속 표면에 일정한 패턴, 즉 기요셰를 새긴 다이얼을 말합니다. 18세기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스크래치와 변색을 방지하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 다이얼을 처음 고안했습니다. 다이얼에 정교하게 새긴 패턴을 통해 빛의 반사를 줄이고, 또 스몰 세컨드, 문페이즈,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등 각 서브 다이얼은 서로 다른 패턴으로 구분한 것이죠. 기능성을 위해 탄생한 기요셰 패턴은 훗날 우아한 디자인 요소로도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무브먼트 장식에 쓰이게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말 그대로 형태가 기능을 따른 셈입니다. 자유롭게 반복적인 패턴을 새기면 되기에, 그 종류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울퉁불퉁한 파리의 도로에서 유래한 클루 드 파리(Clous de Paris, 홉네일이라고도 부름), 바늘 땀 모양이 규칙적으로 나열된 소테 피케(Sauté piqué), 불꽃 모양 패턴의 데코 플람므(Decor Flamme), 흔히 발리콘(Barleycorn, 보리알)이라 부르는 그랑 도르주(Grain d’orge), 햇살이 퍼지는 모양의 선버스트(Sunburst) 등이 있습니다. 각각은 패턴 하나하나를 0.1mm 이하의 크기로 가공하기에 극도의 정교함을 요합니다. 근래에는 패턴을 스탬핑으로 찍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브레게는 여전히 숙련된 장인이 전통적인 엔진 터닝 방식을 통해 패턴 하나하나를 일일이 새깁니다. 완성된 다이얼 하단에는 '스위스 기요셰 메인(Swiss Guilloché Main)'이라 표기하며 해당 분야의 선구자라는 자부심을 나지막이 드러냅니다. 대량으로 찍어 흉내만 내는 제품과는 다르다는 거죠. 

 

4. 엔진-터닝 다이얼.jpg

-브레게 클래식 7337

아래쪽 메인 다이얼은 ‘클루 드 파리’, 로마 숫자 아워 인덱스와 미니트 인덱스 사이는 ‘소테 피케’, 외곽 부분은 ‘그랑 도르주’ 기요셰에 해당한다. 

 

기요셰 문구.jpg

 

두번째 시그니처는 브랜드 로고에서도 볼 수 있는 브레게 핸즈(Breguet Hands)입니다. 역사도 오래됐습니다. 엔진 터닝 다이얼(1786년)보다 3년 먼저 나왔습니다. 당시 시곗바늘은 보통 짧거나 넓고, 또 장식이 많은 탓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속이 빈 달 또는 사과 모양의 독특한 핸즈를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처음에는 바늘에서 컷-아웃 가공한 부분이 초승달을 닮았다 하여, 그와 같은 시/분침을 초승달 핸즈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브레게 뿐만 아니라 다른 워치메이커도 같은 디자인을 차용함에 따라, 해당 핸즈는 하나의 정통 양식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러한 디자인의 바늘을 가리켜, 하나의 고유명사로 ‘브레게 핸즈’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브레게 핸즈는 지금까지도 각종 드레스 워치에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골드, 은색 등 다양한 색으로 표시하지만, 정석은 역시나 블루잉(Bluing)을 거쳐 나온 푸른색입니다. ‘블루잉’은 철을 모래 속에 묻어 가열한 뒤 원하는 푸른색이 나오면 즉시 오일이나 물 속에서 식히는 기법을 말합니다. 오랜 지속성과 일반 염료로는 구현하기 힘든 고급스러운 푸른빛을 내는 게 특징입니다. 

 

1. 브레게 핸즈.jpg

-클래식 담므 8068의 브레게 핸즈

 

브레게 핸즈와 같이 또 나온 게 브레게 숫자(Breguet Numerals)입니다. 약간 기울어진 독특한 필기체로 표기한 아라비아 숫자를 말합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이를 아워 인덱스로 활용하고, 다이얼 외곽으로는 작은 별과 백합꽃(Fleur-de-lys), 마름모를 통해 1분, 5분, 15분 단위를 각각 표시했습니다. 1790년에 완성된 이 디자인은 보통 그랑 푀 에나멜(Grand feu Enamel) 또는 자개 다이얼과 짝을 이룹니다. 참고로, 브레가가 자랑하는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은 골드 베이스 위에 에나멜을 균일한 층으로 얇게 덧칠한 다음, 800℃ 이상의 고온에서 굽고 식히는 과정을 거쳐 완성합니다. 원하는 색감을 얻기까지 앞선 과정을 반복하고요. 에나멜을 정교하게 칠하는 만큼 적당한 온도와 굽는 시간도 관건입니다. 숙련된 장인만이 이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때로는 몇 주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브레게는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 한 켠에 엔진 터닝 다이얼과 비슷하게 ‘SWISS EMAILLE GRAND FEU’ 문구를 새겨 스위스 전통을 강조하곤 합니다. 최근 떨어지는 품질로 그랑 푀 에나멜을 흉내내는 다이얼이 많기 때문입니다.  

 

5. 브레게 숫자-2.jpg

-클래식 5177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 버전

 

그랑푀 에나멜 표식.jpg

 

18세기 브레게의 시계가 큰 성공을 거두자, 그를 모방하는 제품이 늘어갔습니다. 당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진품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고민했고, 1795년 마침내 자신의 서명을 다이얼에 숨기기로 했습니다. 다이얼 표면에 얇게 새겨 넣는 이 비밀 서명(The secret signature)은 빛에 비스듬히 비추지 않으면 잘 안 보이는데요. 현재 브레게는 금속 표면에 예리한 기구로 조각하는 드라이포인트(Drypoint) 기법을 활용한다고 합니다. 인그레이빙을 할 수 없는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의 경우 다이얼 글라스 안쪽에 숨겨 두곤 합니다. 해당 표식 역시 빛 반사에 따라 특정 각도에서만 보입니다.    

 

비밀서명 1.jpg

-클래식 7337의 비밀 서명

 

비밀서명 2.jpg

-클래식 5177의 비밀 서명

 

브레게 시계에는 비밀 서명과 함께 저마다 고유 번호(A Single Number)가 있습니다. 보통 다이얼에서 브레게 로고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N°이라는 기호와 함께 고유의 숫자를 따로 표기합니다. 브레게는 18세기 후반 고유 번호를 도입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서 업데이트해 나가고 있습니다. 수백년을 이어온 이 전통은 자신의 아카이브와 고객을 보다 철저하게 관리하기 위함입니다. 시계 소유주는 고유 번호를 통해 제품의 출처와 이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유번호 1.jpg

-클래식 담므 8068의 고유 번호

 

고유번호 2.jpg

-클래식 7337의 고유 번호

 

브레게에서 선보이는 대부분의 시계는 케이스 측면에 촘촘하게 홈을 새깁니다. 브레게는 이를 가리켜 플루티드 케이스 밴드(Fluted Caseband)라 일컫습니다. 마치 동전의 옆면을 닮은 이 디자인은 18세기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회중시계를 제작할 때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습니다. 작업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 브레게 역시 여전히 숙련된 장인이 홈 하나하나를 수작업으로 마감합니다. 제품 성향에 따라 홈의 간격이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가령, 드레스 워치 계열의 클래식이나 트래디션, 레인 드 네이플은 홈을 촘촘하게 새기고, 반대 성향의 마린이나 타입의 경우 홈을 좀더 깊고 넓게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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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담므 8068의 플루티드 케이스 밴드

 

케이스 밴드.jpg

-마린 크로노그래포 5527의 플루티드 케이스 밴드

 

브레게를 대표하는 클래식이나 트래디션 컬렉션에서 케이스 측면의 홈을 따라가다 보면 길게 쭉 뻗은 러그와 마주합니다. 접촉면을 보면, 케이스 덩어리를 프레스로 찍어내고 CNC 머신으로 다듬는 현대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과거 CNC 머신이 없던 시절 케이스에 러그를 일일이 용접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따랐습니다. 흔히 이런 러그를 웰디드 러그(Welded Lug)라 합니다. 브레게는 이 러그를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습니다. 스트랩 결합 방식도 고전적입니다. 일반적인 스프링-바 대신 핀과 나사를 이용해 스트랩을 러그에 고정합니다. 브레게가 이처럼 생산 효율이 떨어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플루티드 케이스 밴드와 함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미학적으로 좀더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케이스 디자인도 한 몫 합니다. 아무래도 러그가 없는 상태에서 케이스 측면에 홈을 새기는 게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측면 가공이 마무리되면, 각 러그를 용접해 하나의 케이스를 완성합니다. 

 

러그 3.jpg

-클래식 5177의 웰디드 러그

 

러그 2.jpg

-클래식 5365의 웰디드 러그

 

엔진 터닝 다이얼부터 웰디드 러그에 이르기까지, 브레게가 말하는 7가지 시그니처는 어떻게 보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동화 시대에는 맞지 않게 사람의 손을 많이 타는 작업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을 두고 감히 하이엔드라 부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을 수 있을 때까지 닿은 제품에 ‘하이엔드’의 가치를 부여하곤 합니다. 브레게는 예나 지금이나 하이엔드의 정석대로 제품 하나하나를 손수 만듭니다. 자신이 확립한 7가지 시그니처의 전통을 따르는 건 물론입니다. 예로부터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브레게는 지금도 미래를 위해 자신의 시초가 남긴 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갑니다. 혹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어디선가 이를 보고 있다면, 아마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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