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알 로터, 작지만 위대한 그 존재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거인이 마침내 깨어났습니다. 올해 화려한 부활의 찬가를 부른 그의 이름은 유니버설 제네브(Universal Genève). 국내에서도 새 출발을 알린 이들의 아이콘이라 하면 역시나 폴라우터(Polerouter)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폴라우터는 일단 ‘시계의 피카소’로 불리는 전설의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Gérald Genta)가 처음으로 디자인한 시계로 유명합니다. 거장의 첫 작품이라는 상징성이 크긴 하지만, 과거 폴라우터는 기술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룬 시계였습니다. 마이크로 로터를 도입한 선구자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 유니버설 제네브 폴라우터

- 칼리버 UG-110
작은 크기 때문에 ‘콩알 로터’로도 불리는 마이크로 로터는 무브먼트의 수직 공간을 차지하는 일반적인 풀 로터와 달리 무브먼트의 수평 공간을 점유합니다. 그래서 회전력으로 동력을 생산하는 로터가 브릿지와 같은 선상에 위치합니다. 수평 면적만 잘 활용하면 로터가 무브먼트 두께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결과적으로 시계를 한층 얇게 만들 수 있습니다. 로터가 브릿지를 비롯한 부품을 가리지 않으니 무브먼트 감상에 방해가 될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로터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지금이야 마이크로 로터를 적용한 시계를 비교적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1950년대 당시만 해도 마이크로 로터는 ‘오토매틱 시계는 두껍다’는 편견을 깬 일대 혁신이었습니다.

- 뷰렌의 1950년대 광고

- 뷰렌의 수석 엔지니어, 한스 코허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1950년대 초, 시계 시장은 손으로 일일이 크라운을 감아서 시계에 밥을 주지 않아도 되는 오토매틱 워치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토매틱 워치는 무브먼트 위에 로터를 얹다 보니 케이스가 상대적으로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포츠 워치라는 개념이 아직 완전히 확립되기 이전인 시대상도 드레스 워치 기준의 두께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기도 했습니다. 이때 스위스 렝나우에 위치한 시계제조사 뷰렌(Buren Watch Co.)의 수석 엔지니어 한스 코허(Hans Kocher)는 오토매틱 워치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합니다. 그의 발상은 단순했습니다. 로터를 무브먼트 ‘위’에 얹지 않고 ‘안’에 파넣는 것이었습니다. 한스 코허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고자 로터의 크기를 줄여 무브먼트의 수평 공간 한 켠에 배치하고, 그 주변으로 배럴에 동력을 전달하는 기어를 유선형으로 배치했습니다. 뷰렌은 처음에 이 구조를 ‘행성처럼 회전한다’하여 플래너터리(Planetary, 행성) 와인딩 시스템이라 불렀습니다.

- 유니버설 제네브의 칼리버 1-69(칼리버 215의 후기형)
1954년 6월, 뷰렌은 한스 코허가 발명한 플래너터리 와인딩 시스템으로 특허(No. CH329804)를 출원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제네바에서 마이크로토르(Microtor)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시스템을 개발하던 한 시계제조사가 있었습니다. 유니버설 제네브입니다. 한 발 늦은 그들은 1955년 5월 ‘마이크로토르’의 핵심인 칼리버 215로 특허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직전 해(1954년) 데뷔한 폴라우터 역시 기존 칼리버 138에서 곧장 칼리버 215로 갈아타며 새 시대를 열게 됩니다. 즉, 유니버설 제네브가 마이크로 로터의 상용화에서는 한발 앞선 겁니다. 다만, 뷰렌의 선행 특허권 때문에 유니버설 제네브의 특허는 바로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폴라우터에 탑재된 일부 칼리버 215에는 '특허 출원 중(Patented Rights Pending)'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아가 유니버설 제네브가 관련 무브먼트를 1개 생산할 때마다 뷰렌에게 4스위스프랑의 로열티를 지불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전해집니다.
- 유니버설 제네브와 뷰렌의 1950년대 광고
유니버설 제네브 칼리버 215의 ‘특허 출원 중’ 낙인은 다행히도 1958년 이후로 사라지게 됩니다. 유니버설 제네브가 같은 해 마침내 뷰렌과의 원만한 합의 끝에 칼리버 215의 마이크로 로터 특허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1958년 바젤월드에서 마이크로 로터를 홍보하는 광고에는 두 브랜드의 로고가 함께 표시되기도 했습니다. 보다 앞선 1957년에는 뷰렌의 한스 코허가 유니버설 제네바의 개발자 프레드 반디(Fred Bandi)와 함께 스위스 시계학회지(Journal Suisse d'Horlogerie)에 마이크로 로터 관련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두 라이벌의 총성 없는 전쟁이 무승부라는 해피엔딩으로 일단락된 셈입니다.

- 뷰렌의 슈퍼 슬렌더
뷰렌이 쏘아올린 작은 공
유니버설 제네브가 마이크로 로터의 상용화를 선수치고 폴라우터를 선보이는 동안, 뷰렌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1957년 오랜 연구 및 개발 끝에 마이크로 로터 타입의 자동 칼리버 1000(논 데이트)/1001(데이트 버전)을 완성했고, 두께가 각각 4.2mm, 4.8mm에 불과한 무브먼트를 탑재한 시계 ‘슈퍼 슬렌더(Super Slender)’ 역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뤘습니다. 뷰렌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칼리버 1000/1001을 토대로 한층 얇은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를 만들고자 했고, 한스 코허를 비롯한 개발진은 1965년 마침내 두께 2.85mm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칼리버 1280으로 달콤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겠지만, 칼리버 1280은 훗날 시계사를 바꿀 역사의 씨앗이 됩니다.
- 잭 호이어

- 제랄드 뒤부아

- 윌리 브라이틀링
마이크로 로터에 정통한 뷰렌을 1960년대 초부터 눈여겨보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레이싱 크로노그래프로 이름을 날리던 호이어의 수장 잭 호이어(Jack Heuer)입니다. 당시 호이어는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판매량 급감으로 인한 위기를 타계하고자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개발하려 했습니다. 잭 호이어는 모듈 설계에 일가견이 있는 제랄드 뒤부아(Gerald Dubois)와 머리를 맞댔지만, 자신들의 기술력만으로는 원하는 두께의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때 뷰렌의 마이크로 로터가 눈에 들어왔고, 잭 호이어와 제랄드 뒤부아는 뷰렌을 우군으로 포섭합니다. 이후 호이어와 함께 또 다른 자금줄이 되어줄 브라이틀링까지 관련 프로젝트에 합류함에 따라 탄탄한 4자 동맹이 형성됩니다. 달타냥과 삼총사처럼 똘똘 뭉친 연합군은 곧장 ‘프로젝트 99’라는 비밀스러운 이름 아래 자동 크로노그래프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 뷰렌 칼리버 1280의 수정 설계도
프로젝트 99의 열쇠는 역시나 마이크로 로터 베이스의 무브먼트를 제공할 뷰렌이 쥐고 있었습니다. 뷰렌이 이때 내민 카드가 바로 칼리버 1280이었습니다. 뷰렌의 한스 코허는 제랄드 뒤부아와 머리를 맞대고 칼리버 1280에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결합할 방안을 다각도로 강구했습니다. 당시 제랄드 뒤부아가 고안한 모듈은 오늘날처럼 무브먼트 뒷면(다이얼 쪽)이 아니라 앞면(브릿지 쪽)에 바로 얹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크로노그래프 바늘을 구동하는 축이 칼리버 1280을 관통해 설치되어야 했습니다. 한스 코허는 그에 맞춰 공간 확보를 위해 칼리버 1280을 수정했고, 제랄드 뒤부아 역시 모듈을 부분적으로 개선했습니다.


-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중 하나인 칼리버 11

- 칼리버 11을 탑재한 호이어 모나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지원군도 늘었습니다. 호이어는 또 다른 경쟁사인 레오니다스(Leonidas)와 합병했고, 뷰렌은 미국의 해밀턴(Hamilton)에 의해 인수되었으며, 제랄드 뒤부아는 에릭 데프라(Eric Dépraz)와 손잡고 뒤부아 데프라(Dubois Dépraz)를 설립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막강한 자원을 얻은 프로젝트 99 연합군은 1960년대말 마침내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와 오토매틱(Automatic)을 합친 ‘크로노매틱(Chronomatic)’이라는 이름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1을 완성하게 됩니다. 마이크로 로터 베이스의 크로노매틱은 1969년 3월 3일 연합군의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베일을 벗었고, 완제품 회사인 브라이틀링·호이어·해밀턴은 그해 바젤월드에서 자동 칼리버 11을 탑재한 각 컬렉션을 공개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당시 공개된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워치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모나코입니다.

- 피아제 칼리버 12P

- 칼리버 12P를 탑재한 시계 광고
울트라-씬의 신기원
1950년대 유니버설 제네브와 뷰렌의 경쟁 구도는 스위스 라 코토페의 터줏대감을 자극했습니다. 울트라-씬 명가로 막 도약하던 피아제(Piaget)입니다. 1957년 이미 두께 2mm의 수동 울트라-씬 칼리버 9P를 완성했던 피아제는 유니버설 제네브와 뷰렌을 통해 마이크로 로터의 잠재력을 빠르게 간파했습니다. 마이크로 로터가 자동 울트라-씬 무브먼트의 또 다른 해법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 피아제는 바젤월드에서 마이크로 로터를 도입한 자동 울트라-씬 칼리버 12P를 전격 공개했습니다. 칼리버 12P의 두께는 단 2.3mm. 이보다 두꺼운 뷰렌의 칼리버 1285(두께 2.85mm)가 5년 뒤에야 나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피아제가 갈고닦은 울트라-씬 기술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칼리버 12P는 당시 세운 기록을 바탕으로 반세기 넘게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로 위용을 떨쳤습니다. 전설의 역사는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0년 12P 탄생 50주년을 맞아 새롭게 나온 칼리버 1200P가 마이크로 로터를 비롯한 전통적 설계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피아제는 칼리버 1200P를 베이스로 스켈레톤 모델은 물론 울트라-씬 퍼페추얼 캘린더까지 선보이고 있습니다.


- 불가리 칼리버 BVL 138


- 칼리버 BVL 305를 탑재한 옥토 피니씨모 퍼페추얼 캘린더
마이크로 로터를 활용해 자동 울트라-씬 분야를 평정한 피아제의 독주는 2017년에 이르러 멈춰 섰습니다. 당시 불가리가 두께 2.23mm의 자동 칼리버 BVL 138로 피아제의 기록을 경신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칼리버 BVL138 역시 마이크로 로터를 통해 극한의 두께를 실현했습니다. 다음 시나리오도 피아제와 닮아 있습니다. 불가리는 2021년 칼리버 BVL 138을 베이스로 두께 2.75mm의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퍼페추얼 캘린더 칼리버 BVL 305을 완성했습니다. BVL 305를 탑재한 옥토 피니씨모 퍼페추얼 캘린더 역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퍼페추얼 캘린더 시계에 등극했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 불가리 칼리버 BVF 100
칼리버 BVL 138의 계보가 이어지는 한편, 올해 불가리는 마이크로 로터를 활용한 차세대 칼리버 BVF 100을 또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칼리버 BVF 100은 기존과 같은 마이크로 로터 타입이지만 지향하는 바가 살짝 다릅니다. 두께가 2.35mm로 이전(지름 36.6mm, 두께 2.23mm)보다 살짝 늘어난 대신 지름이 31mm로 비약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덕분에 칼리버 BVF 100을 탑재한 옥토 피니씨모 37도 지름 37mm로 기존 옥토 피니씨모 오토매틱보다 3mm나 작아졌습니다. 즉, 칼리버 BVF 100이 최근 시계 트렌드에 부합하는 작은 시계를 만들기 위한 토대가 되는 셈입니다.

- 파텍 필립 칼리버 240


- 칼리버 240을 탑재한 노틸러스 50주년 기념 5610/1P-001
위기 속에 태어난 레전드
쿼츠 파동으로 대두되는 1970년대 스위스 업계 최악의 위기는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로열 오크(1972), 노틸러스(1976) 같은 희대의 명작이 이 시기에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틸러스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은 파텍 필립은 거기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틸러스와는 정반대 성향의 슬림 드레스 워치 ‘골든 엘립스(1977)’까지 연달아 출시했습니다. 새로운 직사각형 쉐입의 골든 엘립스에 탑재된 무브먼트 역시 새로웠습니다. 브랜드의 새 기반을 다진 그 주역이 마이크로 로터를 도입한 전설의 칼리버 240입니다. 레전드의 가치는 수치로도 증명됩니다. 당시 칼리버 240은 두께 2.53mm로 브랜드 대표 수동 칼리버 215(두께 2.55mm)보다 슬림한 구조를 통해 새로운 워크호스로서의 활약을 예고했습니다. 얇은 두께를 위시한 활용도는 기대이상이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모듈과의 조합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습니다. 파텍 필립이 자랑하는 월드타이머, 퍼페추얼 캘린더뿐만 아니라 스카이 차트, 셀레스티얼 선라이즈 & 선셋, 월드타임 미닛 리피터 같은 그랜드 컴플리케이션도 칼리버 240을 베이스로 탄생했습니다. 칼리버 240의 단독 활약상은 50년 가깝게 이어온 그 역사가 증명합니다. 골든 엘립스는 물론 드레스 워치의 정석으로 통하는 칼라트라바의 메인 엔진으로 수십년간 활약했고, 최근에는 노틸러스 50주년 기념 모델에서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한 바 있습니다.

- 파텍 필립 칼리버 31-260


- 칼리버 31-260을 탑재한 5249R-001
파텍 필립은 2011년 칼리버 240을 제작하며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차세대 마이크로 로터 칼리버 31-260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차세대는 칼리버 240(지름 27.5mm)과 달리 기어트레인에 맞춰 브릿지를 분활함과 동시에 지름도 31.7mm 이상으로 키웠습니다. 칼리버 240이 처음 등장한 1970년대는 표준 사이즈가 지름 37mm 이하였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지름 40mm 이상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칼리버 240을 지름 40mm 이상의 케이스에 탑재하면 케이스 내부에 빈 공간이 크게 남게 되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조금 더 큰 칼리버 31-260이 나오게 된 셈입니다. 게다가 차세대 칼리버는 일반 쓰리-핸즈 모델보다 컴플리케이션에 주로 쓰입니다. 신고식을 치른 모델도 시/분/초를 서로 다른 축으로 표시하는 레귤레이터 타입의 애뉴얼 캘린더였고, 이후 트래블 타임(GMT), 애뉴얼 캘린더 트래블 타임, 날짜 정보를 일렬로 나타내는 인-라인 퍼페추얼 캘린더까지 스펙트럼이 넓어졌습니다. 올해는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에 온-디맨드 오토마톤을 결합한 독창적인 컴플리케이션까지 칼리버 31-260을 베이스로 탄생하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계속해서 증명해오고 있습니다.

- 쇼파드 칼리버 L.U.C 96.01-L

- L.U.C 1860
또 다른 전설의 시작
쿼츠 파동이 지나가고 기계식 시계가 다시금 각광받던 1990년대, 사세가 꺾였던 시계제조사들이 기지개를 켜며 새로운 성장 동력원을 모색했습니다. 스위스 플러리에의 쇼파드 역시 과감한 투자를 통해 독자적인 매뉴팩처를 설립하고자 했고, 1993년 완공된 둥지에서 곧장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이때 같은 지역의 명망 높은 워치메이커 미셸 파르미지아니(Michel Parmigiani)가 힘을 보탰다고 합니다. 훌륭한 조력자와 머리를 맞댄 쇼파드는 1996년 마침내 브랜드 최초의 인하우스 무브먼트로 마이크로 로터를 도입한 칼리버 L.U.C 1.96(현재는 L.U.C 96.01-L)를 완성했습니다. 당시 이 무브먼트는 3.3mm의 슬림한 두께도 두께지만, 탁월한 설계로도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았습니다. 양방향 와인딩과 더불어 ‘트윈 테크놀로지’라 일컫는 더블 배럴을 통해 파워리저브를 65시간까지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L.U.C 1.96은 그렇게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하면 와인딩 효율이 낮고 파워리저브까지 떨어진다’는 편견을 보기좋게 깨뜨렸습니다.

- 쇼파드 칼리버 L.U.C 96.09-L

- L.U.C 퀄리테 플러리에
현재 L.U.C 96.01-L 역시 파텍 필립의 칼리버 240과 마찬가지로 얇은 두께를 바탕으로 영역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습니다. 빅 데이트를 지원하는 퍼페추얼 캘린더는 물론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을 재설계한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와 투르비용을 결합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매 시간을 소리로 알리는 차임 컴플리케이션까지 L.U.C 96.01-L을 토대로 제작됩니다. 나아가 쇼파드는 근래 같은 베이스의 L.U.C 96.09-L을 통해 뛰어난 정확성의 척도인 ‘COSC 인증’, 플러리에에 생산된 하이엔드 무브먼트임을 공인하는 ‘퀄리테 플러리에(Qualité Fleurier, QF) 인증’을 동시에 획득하며 차별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 보쉐 칼리버 VMF 5400
보쉐 매뉴팩처의 축복
보쉐 매뉴팩처 플러리에(Vaucher Manufacture Fleurier, 이하 VMF)는 2003년 미셸 파르미지아니와 그를 후원하는 산도즈 재단(Sandoz Family Foundation)이 설립한 하이엔드 무브먼트 전문 매뉴팩처로 유명합니다. VMF의 대표 무브먼트 중 하나가 마이크로 로터를 적용한 칼리버 VMF 5400 시리즈입니다. 두께 2.6mm에 불과한 이 에보슈는 하이엔드 스펙임에도 기본적인 베리에이션이 상당합니다. 초침이 없는 기본형부터 6시 방향 스몰 세컨드, 스몰 세컨드 & 데이트, 빅 데이트 등 다양한 버전이 존재합니다. 각 에보슈를 활용하는 고객의 면면도 화려합니다. 패밀리 브랜드인 파르미지아니(Parmigiani Fleurier)는 물론 리차드 밀(Richard Mille),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 에르메스(Hermès), 얼마 전 국내에도 상륙한 독립 시계제조사 제랄드 찰스(Gerald Charles) 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 파르미지아니 칼리버 PF703을 탑재한 톤다 PF


- 리차드 밀 RM033
먼저, 파르미지아니는 과거 톤다 1950부터 지금의 톤다 PF까지 칼리버 VMF 5400 시리즈를 꾸준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해당 무브먼트를 베이스로 라트라팡테와 유사한 메커니즘에 GMT 기능을 결합하는 등 라인업 확장에도 적극적입니다. 반면 리차드 밀은 베이스 무브먼트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가공합니다. 베이스 플레이트를 티탈릿(Titalyt®) 처리된 티타늄으로 제작해 샌드 블라스트 가공을 곁들이거나, 각 브릿지는 또 오픈워크 가공으로 하나하나 오려내는 식입니다.

- 에르메스 칼리버 H1950


- 슬림 데르메스 스켈레톤 룬
에르메스는 VMF의 우수 고객이기에 앞서 약 25%의 지분을 보유한 주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르메스 시계의 무브먼트 대부분을 VMF에서 만듭니다. VMF 5400 시리즈를 베이스로 제작한 칼리버 H1950도 그중 하나입니다. 슬림 데르메스 컬렉션 전용으로 쓰이는 H1950은 베이스의 안정적인 설계를 바탕으로 로터 및 브릿지 표면만 브랜드 로고를 활용한 H 패턴으로 달리합니다. 대신 GMT, 문페이즈, 퍼페추얼 캘린더 등 다양한 모듈과의 결합을 통해 베리에이션이 다양하게 확장됩니다. 최근에는 감각적인 가공에도 눈을 떴습니다. VMF 5400 시리즈의 뼈대만 남기고 살을 발라 낸 스켈레톤 베이스에 문페이즈를 결합한 버전이 ‘슬림 데르메스 스켈레톤 룬’을 통해 새롭게 나왔고, 브릿지의 색깔을 달리한 베리에이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 파네라이 칼리버 P.4001/S를 탑재한 섭머저블 GMT PAM01495
만만치 않은 다크호스
마이크로 로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관련 무브먼트를 보유한 브랜드도 있습니다. 파네라이가 대표적입니다. 남성성을 부각하는 특유의 볼드한 디자인 때문에 두께에 크게 연연하지 않을 듯 하지만, 파네라이는 루미노르 두에나 과거 라디오미르 1940과 같이 상대적으로 얇은 시계에 한해 마이크로 로터 칼리버 P.4000 시리즈를 활용하곤 했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브랜드 기조가 내구성을 강조하는 근본으로 돌아감에 따라 일반적인 쓰리-핸즈 모델에는 해당 무브먼트를 자주 쓰지 않는 편입니다. 대신, 스켈레톤 가공으로 존재감을 부각한 GMT 칼리버 P.4001/S나 퍼페추얼 캘린더 P.4100과 같은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가 섭머저블 혹은 루미노르 컬렉션에서 간간이 존재감을 드러내곤 합니다.


- 루이 비통 칼리버 LFT023

- 차세대 땅부르
또 다른 뜻밖의 브랜드로는 루이 비통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같은 패션 하우스 출신으로 마이크로 로터를 적극 활용하는 에르메스의 영향이 그들에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2023년, 루이 비통은 차세대 땅부르를 통해 마이크로 로터 기반의 칼리버 LFT023을 처음 공개했습니다. 루이 비통이 인수한 라 파브리크 뒤 떵(La Fabrique du Temps) 매뉴팩처에서 개발한 칼리버 LFT023은 얇은 두께는 물론 개성적인 브릿지 분할, 구석구석 흠잡을데 없는 마감 등 미학적으로도 애호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안정성도 믿음이 갑니다. 제네바 크로노메트릭 천문대(Geneva Chronometric Observatory)의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크로노미터 인증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 로저드뷔 칼리버 RD720SQ

- 엑스칼리버 모노발란시어
특정 모델에만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하는 브랜드도 있습니다. 먼저, 로저드뷔는 ‘엑스칼리버 모노발란시어’와 같은 브랜드 대표 모델에 마이크로 로터를 적극 활용합니다. 특히 각 모델에 탑재한 칼리버 RD720SQ는 뼈대만 남기는 스켈레톤 가공으로 빛이 투과되는 건축학적 미학을 극대화합니다. 덕분에 마이크로 로터가 공중에 떠서 회전하는 듯한 신비로운 효과까지 연출됩니다. 마이크로 로터의 회전으로 메인 스프링이 감기는 것부터 밸런스가 박동하기까지, 시계가 작동하는 일련의 과정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내 다른 무브먼트와 마찬가지로 제네바산 하이엔드 무브먼트임을 인증하는 ‘제네바 씰(Poinçon de Genève)’을 받는 건 물론입니다.

- 위블로 칼리버 MHUB6035를 탑재한 빅뱅 투르비용 오토매틱 오렌지 사파이어
위블로는 상위 컴플리케이션 라인으로 눈을 돌립니다. 2021년 첫선을 보인 칼리버 MHUB6035가 빅뱅 투르비용 라인의 엔진으로 줄곧 활약하고 있습니다. ‘아트 오브 퓨전’을 외치는 브랜드의 무브먼트답게 구조 역시 독특합니다. 스켈레톤 베이스에 마이크로 로터가 시계 정면 12시 방향으로 그대로 노출되고, 6시 방향에서 휘몰아치는 플라잉 투르비용이 그와 대칭을 이룹니다. 사파이어 크리스탈 브릿지를 활용해 빛이 투과되는 스켈레톤의 매력과 입체감을 한껏 살린 디테일도 돋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위블로의 칼리버 MHUB6035는 확실히 다른 무브먼트보다 보는 맛이 있습니다.


- 로랑 페리에 칼리버 FBN 229.01
재야의 고수
요즘은 마이크로 로터를 다루는 독립 워치메이커의 솜씨도 보통이 아닙니다. 특히, 로랑 페리에(Laurent Ferrier)는 관련 기술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대표 칼리버 FBN 229.01은 두께 4.35mm로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하는 다른 무브먼트보다는 두꺼운 편입니다. 대신 그를 상쇄할 남다른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2개의 니켈-인 합금 이스케이프 휠이 밸런스 휠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현대적인 내추럴 이스케이프먼트(Natural Escapement) 방식으로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합니다. 칼리버 FBN 229.01은 그 덕에 마이크로 로터 특성상 상대적으로 작은 배럴을 사용할 수밖에 없음에도 약 72시간의 넉넉한 파워리저브를 제공합니다. 와인딩 메커니즘도 특기할만 합니다. 로터의 축에 2개의 사파이어를 세팅해 로터 회전 시 발생할 수 있는 소음과 진동을 최소화했다고 합니다.


- 차펙 칼리버 SXH7
차펙(Czapek)은 독창적인 설계로 여느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와 차별화합니다. 2020년 브랜드 대표 컬렉션 ‘안타크티크’와 함께 공개된 칼리버 SXH5에서 그들의 독창성이 잘 드러납니다. 컷 아웃 가공된 7개의 브릿지가 기어트레인의 주요 휠 및 밸런스를 지탱하는 건축학적인 구조로 기계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독특한 브릿지 디자인이 그냥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도 아닙니다. 브랜드의 시초인 프랑수아 차펙(François Czapek)이 1845년 파텍-차펙 앤 씨(Patek-Czapek & Cie, 파텍 필립의 전신)을 떠난 후 제작했던 역사적인 무브먼트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특유의 건축학적인 구조는 후속 칼리버 SXH7을 통해 더욱 극대화됩니다. 새로운 칼리버 SXH7은 기존 칼리버 SXH5를 베이스로 7개의 스켈레톤 브릿지 및 마이크로 로터 주변의 메인 플레이트를 과감히 오려냈습니다. 덕분에 스켈레톤 브릿지에 매달린 기어와 밸런스 휠, 마이크로 로터까지 마치 공중에 매달려서 회전하는 듯한 극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 바쉐론 콘스탄틴 칼리버 2550
게임체인저의 등장
마이크로 로터에 일가견이 있는 브랜드들이 서로의 기술력을 겨루는 가운데, 바쉐론 콘스탄틴이 기습적으로 이 리그에 출사표를 던집니다. 참전 준비는 7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올해 마침내 브랜드 최초로 마이크로 로터를 도입한 칼리버 2550이 새로운 오버시즈 셀프와인딩 울트라-씬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칼리버 2550의 두께는 단 2.4mm. 그럼에도 파워리저브는 약 80시간에 달합니다. 울트라-씬 자동 무브먼트치고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비결은 더블 배럴에 있습니다. 칼리버 2550의 배럴은 2개가 위아래로 겹쳐지는 직렬 구조로 설계됩니다. 이때 두 배럴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마주보게 쌓아 배럴 커버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두께가 늘어나는 걸 최소화했다고 합니다. 한 쌍이 된 두 배럴은 별도의 브릿지 없이 메인 플레이트에만 고정됩니다. 메종에서는 이를 ‘서스펜디드 더블 배럴’이라 부릅니다. 한쪽에만 매달린다 하여 ‘행잉 배럴’이라고도 일컫는 이 구조은 울트라-씬 장르에서는 널리 활용되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칼리버 2550은 극도로 얇은 배럴 2개를 그와 같이 효율적으로 배치하면서 두 마리 토끼(얇은 두께와 넉넉한 파워리저브)를 동시에 잡은 겁니다.


- 칼리버 2550을 탑재한 오버시즈 셀프와인딩 울트라-씬
칼리버 2550은 앞으로의 쓰임새도 크게 기대가 됩니다. 패트리모니, 트래디셔널과 같은 드레스 워치에 단독으로 쓰일 수도 있고, 극도로 얇은 두께 때문에 다른 모듈과의 궁합도 훌륭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퍼페추얼 캘린더 모듈과 만났을 때 좋은 시너지가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버시즈 셀프와인딩 울트라-씬이 올해 칼리버 1120에서 새로운 칼리버 2550으로 교체하며 다이어트에 성공했듯, 현재 칼리버 1120 베이스의 오버시즈 퍼페추얼 캘린더 울트라-씬 또한 향후 칼리버 2550을 토대로 한층 얇은 두께를 실현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점쳐봅니다.

- 유니버설 제네브 폴라우터

- 유니버설 제네브 칼리버 UG-110
원조의 반격
마이크로 로터의 원조도 올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유니버설 제네브는 먼저 실질적 수장인 조지 컨(Georges Kern)의 진두지휘 아래 마이크로 로터 설계에 빠삭한 인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하나둘 모인 개발진은 이후 관련 메커니즘을 현대적으로 설계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LTM(La Temps Manufacture)과 함께 새로운 칼리버 UG-110을 완성했습니다. UG-110은 비주얼부터 눈에 확 띱니다. 타 무브먼트이 비해 골드 마이크로 로터가 월등하게 큽니다. 그만큼 높은 와인딩 효율이 기대됩니다. 파워리저브도 약 72시간으로 비교적 넉넉한 편입니다.

- 유니버설 제네브 칼리버 UG-200
원조의 조커는 또 따로 있습니다. 마이크로 로터 시스템에 크로노그래프를 결합한 일체형 칼리버 UG-200입니다. 두 메커니즘의 만남은 꽤나 효과적입니다. 일단 칼리버 UG-200은 크로노그래프 구동계가 컬럼 휠과 수직 클러치 조합으로 구성되기에 상대적으로 두꺼워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체 두께를 6.63mm로 억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시나 마이크로 로터 설계 덕분입니다. UG-200은 같은 ‘하우스 오브 브랜즈’ 그룹의 식구인 브라이틀링의 인프라를 활용해 제작한다고 합니다. 브라이틀링 매뉴팩처의 최첨단 설비로 주요 부품을 생산하고, 조립과 마감은 유니버설 제네브에서 직접 진행하는 식입니다. 같은 이유로 UG-200이 브라이틀링의 워크호스 크로노그래프 B01을 베이스로 마이크로 로터를 결합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돌기도 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브라이틀링의 설비만 공유할 뿐, 부품의 90% 이상을 유니버설 제네브 전용으로 새롭게 제작한다고 합니다.

- 칼리버 UG-200을 탑재한 신형 컴팩스
현재 유니버설 제네브는 카브리올레와 같은 일부 컬렉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모델에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를 탑재합니다. 과연 관련 메커니즘의 원조이자 권위자답습니다. 물론, 걸출한 후발 주자들이 이미 리그를 점령한 상황에 제대로 된 성적표를 받아봐야 오리지널의 진가가 입증되겠지만, 마이크로 로터의 전통을 단순히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결실만큼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합니다. 앞으로의 확장성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원조의 손맛을 그리워하던 팬들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오리지널리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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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