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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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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 르 브라쉬 매뉴팩처 전경 공식 사진 ⓒ Blancpain

타임포럼은 지난 SIHH 기간 따로 시간을 할애해서 블랑팡(Blancpain)의 최고급 시계들이 탄생하는 르 브라쉬(Le Brassus) 매뉴팩처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스위스 쥐라 산맥 자락 깊숙이 자리한 발레드주(Vallée de Joux, 풀이하면 ‘주 계곡’)는 19세기경부터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의 요람으로 불릴 만큼 시계 업계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터를 이루고 있는데요. 특히 발레드주가 품은 두 마을 르 브라쉬와 르 상티에에는 오데마 피게, 예거 르쿨트르, 파텍필립, 브레게, 바쉐론 콘스탄틴 등 그 이름만으로도 시계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전통의 고급 시계 제조사들이 집중 포진해 있습니다. 그리고 발레드주를 언급할 때 결코 또 빼놓을 수 없는, 이번 매뉴팩처 투어의 주인공인 블랑팡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 브랜드 중 하나인 블랑팡의 진귀한 시계들이 완성되는 가장 내밀한 공간으로 지금부터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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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HH 기간 숙소가 위치한 제네바 시내에서 발레드주까지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서 인천까지 정도의 거리로 가까운 편이지만, 발레드주로 향하는 길목부터 제법 가파르고 험난한 지형이 이어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훨씬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대중교통으로는 갈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터라 가급적 승용차로 이동해야만 하는데 다행히 블랑팡 본사에서 숙소까지 전용차를 보내주어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시간이 조금 넘어서야 르 브라쉬 마을 초입에 위치한 한 작은 레스토랑에 닿을 수 있었고, 이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후 다시 20분 정도를 달려서 마침내 블랑팡의 르 브라쉬 매뉴팩처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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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브라쉬 마을 깊은 곳 한 언덕 위에 자리한 블랑팡의 매뉴팩처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건물 규모도 크고 무엇보다 주변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이런 표현이 식상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마침 전전날부터 일대에 눈이 많이 내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주변은 온통 눈으로 수북이 쌓여있었고, 고지대 특유의 변덕스러운 기후변화를 보여주듯 햇살이 잠시 들었다가도 어느 순간 숲 어귀에서 구름이 밀려와 끄물끄물 흐려지기 시작해 마을 전체가 오히려 신비롭게 보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직 봄의 기운이 움트지 않은 겨울 산골의 고즈넉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건물 옆쪽 배수로를 타고 녹은 눈과 함께 흘러내리는 물소리까지 들려 정취를 더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홀리듯 주변 경치를 둘러본 후 하얀 문을 통과해 매뉴팩처 건물 안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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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 르 상티에 매뉴팩처 전경 공식 사진 ⓒ Blancpain

앞서 언급했던 블랑팡은 발레드주 남서부에 위치한 두 이웃 마을 르 브라쉬와 르 상티에에 각각 매뉴팩처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르 상티에 매뉴팩처는 과거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하이엔드 무브먼트 제조사 프레드릭 피게(Frédéric Piguet)의 공방을 기반으로 하며, 1980년대부터 이어진 피게 가문과의 끈끈한 인연을 바탕으로 2010년 블랑팡이 프레드릭 피게를 완전히 흡수 합병함으로써 지금의 완전한 수직 통합형 매뉴팩처로 거듭나게 됩니다. 블랑팡은 헤어스프링과 밸런스(이는 스와치 그룹 브랜드이기에 이점이 있음), 주얼 정도를 제외한 90% 이상의 부품을 자체 시설에서 생산하는데, 르 상티에 매뉴팩처에서는 케이스는 물론 다이얼, 무브먼트의 플레이트와 브릿지, 휠과 피니언 등 마이크로 부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부품 제조를 소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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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 르 브라쉬 매뉴팩처 전경 공식 사진 ⓒ Blancpain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부품들을 다듬고(피니싱) 장식을 더해(데코레이션) 최종 조립, 검수하는 작업은 르 브라쉬 매뉴팩처로 옮겨져 시행됩니다. 물론 블랑팡의 모든 시계들이 르 브라쉬 매뉴팩처를 거치는 건 아닙니다. 피프티 패덤즈나 빌레레, 우먼(여성용) 컬렉션의 단순한 기능의 제품들은 르 상티에 매뉴팩처에서 조립 및 테스트까지 마쳐 출고되지만, 컴플리케이션 이상 고가 라인의 시계들은 르 브라쉬 매뉴팩처에서 마침내 영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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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르 브라쉬 매뉴팩처 건물은 애초 시계 제조 공장용으로 설립된 곳이 아닌 농가의 한 오래된 창고용 건물을 현대적으로 개조한 곳이라 블랑팡 직원들 사이에서는 ‘더 팜(The farm)’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곤 합니다. 실제로 체리우드(벚꽃나무 원목) 판넬로 인테리어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특유의 포근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르 브라쉬 매뉴팩처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아마도 블랑팡의 모든 부티크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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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제법 여러 브랜드의 매뉴팩처 시설을 방문해봤지만 블랑팡의 르 브라쉬 매뉴팩처는 확실히 다른 브랜드의 그것과는 차별화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타 브랜드의 경우 부품 생산이 이뤄지는 말 그대로 공장 같은 시설들이 건물 1, 2층에 주로 포진하고, 조립 및 검수가 이뤄지는 워크샵이 해당 건물의 높은 층에 위치해 있거나 건물 동 별로 분산돼 있는 구조라면, 블랑팡은 르 상티에와 르 브라쉬 매뉴팩처 사이트 자체를 완전히 분리해 르 브라쉬 매뉴팩처는 오직 하이엔드 시계가 완성되는 스페셜한 공간으로 꾸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로 르 브라쉬 매뉴팩처에서는 CNC 머신이 돌아가는 소음이나 공장 특유의 분주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인테리어까지 원목 위주로 사용해서 그야말로 워치메이커를 위한 천국(?!)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한 건물 안에 피니싱, 인그레이빙, 어셈블리, 메티에 다르 등 각 분야별로 아뜰리에를 세분화해 관리, 운용하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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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팡 르 브라쉬 매뉴팩처에서 주요 부품 별 하이엔드 피니싱 및 데코레이션이 이뤄지는 아뜰리에로 이동하기 위해 건물 2층으로 향했습니다. 아뜰리에 입구 앞에 놓여진 커다란 수납장(?) 같은 게 우선 눈에 들어왔는데요. 1991년 발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식 자동 손목시계로 화제를 모은 1735의 7백개가 넘는 부품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참고로 1735는 블랑팡의 설립연도를 의미함). 눈에 잘 띄는 부품들(플레이트, 브릿지, 로터, 미닛 리피터 공, 스플릿 세컨즈 클램프 등)부터 점보다 작아서 확대경을 대고 봐야 간신히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미크론 단위의 부품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라벨과 함께 전시하고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쿼츠 위기를 겪으며 대부분의 스위스 시계 제조사들이 암흑기였던 1980~90년대 당시의 시계 제조 현실을 고려할 때 대부분의 마이크로 부품들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가공, 마감되었기에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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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 역대 가장 복잡한 시계로 꼽히는 그랑 컴플리케이션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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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버 1735 
총 740개 부품과 44개 주얼로 구성된 직경 35.9mm x 두께 12.15mm 크기의 무브먼트 안에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 등 앞서 선보인 6개의 마스터피스 시리즈를 구성하는 컴플리케이션을 한데 응축함으로써 블랑팡의 야심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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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코레이션 아뜰리에(Atelier Décorations)는 말 그대로 무브먼트의 각종 장식 그리고 블랑팡이 지향하는 하이엔드급 피니싱이 이뤄지는 공간입니다. 우리가 갔을 땐 2명의 워치메이커가 각각의 워치메이킹 테이블에서 피니싱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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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안(Gentiane, 용담속)으로 불리는 발레드주 인근에서 주로 자생하는 야생 식물의 줄기를 조각 내 건조한 다음 1미크론부터 40미크론까지 각각의 컬러로 분류한 연마용 페이퍼(일종의 사포 역할을 하는)를 부착해 단계별로 폴리싱 혹은 베벨링(앵글라주)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장시안은 이외에도 쓰임새가 많은데, 뿌리를 삶아 정제하면 알코올 성분이 생겨 이를 가지고 술을 만들기도 하고 농축액을 플라스크에 담아 판매하기도 합니다(스위스 민간요법에선 응급 복통약으로도 쓰임). 그리고 용액을 라벤더 오일과 함께 섞어 일명 ‘다이아몬드 페이스트’로 불리는 연마제에 녹여 원하는 부품에 적시듯 발라 아연 블록 위에 올려 놓고 계속 한 방향으로 또는 원을 그리며 마찰하면 우리가 흔히 최고급 피니싱으로 분류하는 미러 폴리싱(Mirror Polishing, 거울처럼 광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표현), 블랙 폴리싱(Black Polishing, 폴리싱한 단면이 각도에 따라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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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닛 리피터용 부품을 갓 앵글라주 작업한 상태 

하이엔드 시계의 가치는 이렇듯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부품 하나하나의 피니싱에서도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블랑팡은 타임 온리 무브먼트부터 하이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에 이르기까지 자체적인 엄격한 피니싱 기준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스페셜한 모델, 유니크 피스, 고가의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로 갈수록 피니싱의 정도와 수준도 비례해 높아지는 게 사실이지만, 피프티 패덤즈나 빌레레 라인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엔트리 스틸 모델에 탑재하는 무브먼트(ex. 1151 & 1315 등)에도 동 가격대의 여느 브랜드 대비 좀 더 사람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핸드 피니싱이 적용돼 있습니다. 블랑팡은 스톤, 끌, 버니셔, 버프와 같은 전통적인 피니싱용 도구 외에 자체적으로 고안한 스페셜 툴도 사용할 만큼 피니싱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있음을 이번 매뉴팩처 투어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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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니싱을 위한 각종 도구들 
이중에는 부품을 고정하는 아버(축)나 피봇을 폴리싱 할 때 사용되는 스페셜 툴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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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데코레이션, 피니싱을 적용한 부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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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숙하게 제네바 스트라이프를 새기는 모습과 1차 결과물 

방 한쪽 면에는 무브먼트 브릿지에 직선형의 코트 드 제네브(Côtes de Genève, 제네바 스트라이프) 패턴을 새길 때 사용되는 장비들도 구비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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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옆에 맞붙은 방에서는 무브먼트 플레이트 전체에 정교한 써큘러 그레이닝(Circular graining, 페를라주) 패턴을 새길 수 있는 장비들이 구비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조작할 기회도 제공되었는데, 생각보다 같은 크기의 동심원을 일정한 간격으로 겹치듯 새기는 작업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프레싱할 때 일정한 힘과 요령이 요구되기 때문에 워치메이커의 숙련도가 그만큼 중요한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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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페를라주 작업 도중 망친 플레이트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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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방에서는 손톱만큼 작은 부품의 단면을 미러 폴리싱하는 작업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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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매뉴팩처 투어 내내 친절하게 안내해준 블랑팡 본사 직원 마티유 로샤(Mathieu Rochat)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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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의 일반적인 플라잉 투르비용 무브먼트 

이어 블랑팡의 투르비용 및 카루셀 무브먼트를 조립 및 케이싱까지 마무리하는 아뜰리에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에 의해 1801년 탄생한 투르비용(Tourbillon)에 관해서는 여러분들도 익히 잘 알고 계시겠지만, 불어로 '회전목마'를 뜻하는 카루셀(Carrousel)은 아직도 생소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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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 카루셀 케이지의 구조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마련된 현미경과 모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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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루셀은 덴마크 태생의 영국 워치메이커 반 보닉센(Bahne Bonniksen, 1859~1935)이 브레게의 투르비용 원리를 응용 발전시켜 1892년 특허를 획득한 중력 상쇄 메커니즘입니다. 보닉센 사후 완전히 잊혀진 카루셀을 블랑팡이 새삼 주목하게 되었고, 마침내 2008년 5일간(120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자랑하는 플라잉 카루셀 자동 무브먼트(칼리버 225)와 시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5일 파워리저브의 원 미닛 플라잉 카루셀 무브먼트는 문페이즈, 캘린더 기능의 추가와 함께 몇 종의 베리에이션으로 이어져 상용화되었고, 급기야 2013년에는 투르비용과 카루셀을 하나의 무브먼트 안에 융화한 르 브라쉬 투르비용 카루셀을, 2015년에는 스포티-아방가르드 버전인 엘-에볼루션 투르비용 카루셀을 연달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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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시 방향에 플라잉 투르비용을, 6시 방향에 플라잉 카루셀을 위치시킨 르 브라쉬 라인 모델의 무브먼트와 다이얼 조립 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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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비용 & 카루셀의 스포티-아방가르드 버전에 해당하는 엘-에볼루션 투르비용 카루셀의 무브먼트와 다이얼 조립 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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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에볼루션 투르비용 카루셀의 카루셀 브릿지 중앙에 사용된 내진 부품(KIF의 변형)조차 블랑팡을 상징하는 JB(창립자 예한 자크 블랑팡Jehan-Jaqus Blancpain의 이니셜) 로고를 형상화했다.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블랑팡의 집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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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부연하면, 투르비용은 동력이 단방향의 싱글 기어 트레인을 따라 이스케이프먼트와 케이지까지 이어진다면, 카루셀은 3번째 휠에서 보완적인 기어 트레인이 추가됩니다. 이로써 하나의 기어 트레인은 이스케이프먼트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인터미디어트 휠을 통해 케이지 휠의 회전(분당 1회전) 운동을 관장하게 됩니다. 때문에 카루셀은 이론적으로는 더욱 효과적인 동력 전달 체계를 갖게 되고, 진폭의 불규칙성도 개선되어 등시성 유지 면에서 장점이 있다는 게 블랑팡 측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투르비용에 비해 기어 트레인이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 플라잉 케이지 휠 안에 밸런스와 이스케이프 훨을 조립 및 조정하기가 더욱 까다롭기 때문에 블랑팡의 르 브라쉬 매뉴팩처 내 경력 많은 워치메이커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이를 다룰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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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비용 & 카루셀 아뜰리에 한쪽에서는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 시계처럼 상대적으로 덜 복잡한 컴플리케이션 시계들도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투르비용 혹은 카루셀 시계의 제조 수량이 워낙 한정적이기 때문에 훨씬 수요가 많은 컴플리케이션 시계에 인력을 고정적으로 더 배분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내려다보며 일과시간 내내 묵묵히 할당된 무브먼트를 조립하고 케이싱하는 작업만 되풀이하는 젊은 워치메이커를 보고 있으니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이내 부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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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비용 & 카루셀 아뜰리에를 둘러보고 다음으로 향한 방은 미닛 리피터 및 그 밖의 하이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이 조립되는 아뜰리에였습니다. 블랑팡의 미닛 리피터 시계는 예외 없이 한 명의 워치메이커가 전담해 조립하는데, 가장 복잡한 피스의 경우 보통 4~5주간이 소요되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걸 다시 분해해 재조립하는데 길게는 두 달 가까이 소요된다고 합니다(일부 모델을 두 번 조립하는 수고스러운 과정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작동 안정성을 모니터링하기 위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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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 미닛 리피터에 사용되는 철제 커씨드럴 공 세트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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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의 가장 고전적인 미닛 리피터 칼리버 33 
이후 출시된 자동 버전 칼리버 35의 베이스가 된 것은 물론, 1993년 오토마타 기능을 추가한 칼리버 332까지 이어져 현재까지 기나긴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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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여섯 개의 걸작들(Six Masterpieces)’ 중 하나로 브랜드 첫 미닛 리피터 손목시계를 출시한 이래 블랑팡은 지금까지 단일 브랜드로는 꽤 다양한 미닛 리피터 시계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미닛 리피터가 복잡 시계의 한 경지를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전통적으로 발레드주 지방의 시계제조사들 사이에서 미닛 리피터는 컴플리케이션 그 이상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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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닛 리피터 & 컴플리케이션 아뜰리에에서는 블랑팡의 클래식한 미닛 리피터 수동 칼리버 33과 2011년 런칭한 브랜드 첫 카루셀 미닛 리피터 수동 칼리버 233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미닛 리피터 & 컴플리케이션 아뜰리에의 한 젊은 워치메이커가 해당 무브먼트 샘플을 번갈아 현미경에 올려 놓고 모니터를 통해 열정적으로 블랑팡의 대표적인 신구(新舊) 미닛 리피터 칼리버(33 & 233)의 특징과 차이점을 설명해주었고(중간에서 본사 직원이 영어로 다시 통역해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닛 리피터의 기본 작동 원리와 주요 부품의 차이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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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팡의 가장 진일보한 형태의 미닛 리피터 칼리버 233 
원 미닛 플라잉 카루셀과 미닛 리피터를 결합한 첫 칼리버이자 이후 등장한 자동 버전 235와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까지 추가한 자동 2358의 베이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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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브라쉬 매뉴팩처의 두 핵심 아뜰리에를 연달아 둘러보고 같은 건물 1층으로 내려와 향한 곳은 무브먼트 및 다이얼의 인그레이빙을 전담으로 하는 아뜰리에 드 그라비어 맹(Atelier de Gravure Main)이었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수공 인그레이빙 아뜰리에로서 마스터 인그레이버가 직접 시안을 디자인하거나 일부 유니크 피스의 경우 고객이 의뢰하면 같이 상의해서 디자인한 다음 고객의 컨펌을 받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는 식입니다. 매우 정교한 다이얼 같은 경우는 인그레이빙만 마치는데도 최대 35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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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 인그레이빙을 포함한 다양한 메티에 다르 테크닉을 활용해 완성한 예술적인 느낌의 다이얼, 무브먼트 브릿지, 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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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그레이빙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마스터 인그레이버 마리-로르 타르부리히 

그리고 어쩐지 낯이 익는 인물 한 명이 눈에 들어옵니다. 블랑팡의 브랜드 소개 책자인 레트르 뒤 브라쉬(Lettres de Brassus) 이슈 10권에서 등장하는 여성 마스터 인그레이버 마리-로르 타르부리히(Marie-Laure Tarbouriech) 씨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권위 있는 공예 관련 시상식에서 수상했을 정도로 블랑팡 매뉴팩처의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블랑팡의 메티에 다르 시리즈 중 우리에게도 친숙한 굵직굵직한 하이라이트 피스 중 상당수가 그녀의 손길을 거쳤습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마침 중국 고객이 스페셜 오더한 유니크 피스의 다이얼 인그레이빙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 1명의 특별한 고객을 위한 비스포크(주문 제작) 버전인 관계로 아쉽게도 작업 중인 피스의 근접 사진 촬영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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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으로 향한 방은 블랑팡이 자랑하는 다채로운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 시계의 다이얼이 완성되는 메티에 다르 아뜰리에였습니다. 이곳에서는 기본 2주에서 최대 5주 이상이 소요되는 핸드 에나멜 페인티드 다이얼을 비롯해, 앞서 인그레이빙 아뜰리에서 선작업을 거친 후 일본 전통 공예 기법인 샤쿠도(Shakudō)와 같은 파티나(녹)를 입히는 과정과 같은 델리키트한 작업들이 이 공간에서 완성됩니다. 입구에 사진으로 전시된 메티에 다르 거대한 파도(The Great Wave), 가네시(Ganesh), 암소들의 전투(Battle of the Queen Cows)와 같은 유니크 피스들이 어김없이 시선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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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색상의 에나멜 파우더 
이를 특수 제조한 오일과 뒤섞어 컬러 페인팅에 이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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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여러 종류의 핸드 페인티드 다이얼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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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티에 다르 아뜰리에에는 두 명의 전담 에나멜러가 작업 중이었는데, 연로한 마스터 에나멜러가 이제 갓 입문한 젊은 에나멜러를 틈틈이 도제식으로 가르치면서 업무를 배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작업하는 테이블 초입에는 중국, 인도, 일본의 고객들이 주문 제작한 다이얼이 진열돼 있었습니다. 한 눈에도 오리엔탈풍의 다이얼이 대부분이어서 이러한 류의 시계는 특히 아시아 고객들이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해당 다이얼은 미니어처 에나멜 페인팅 기법을 이용해 다이얼에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림을 그리고 변색 방지를 위해 1,000도씨 정도 고온의 가마에서 구워 완성합니다. 메티에 다르 아뜰리에 입구에 위치한 한 방에는 이러한 다이얼을 구워내는 작은 오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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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 에나멜러가 한창 작업 중이었던 용 모티프 플레이트. 
오토마타 기능의 미닛 리피터 시계에 사용되기 때문에 레버 조작시 저 용의 입이 다물었다 벌어졌다 하며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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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즐거웠던 메티에 다르 아뜰리에를 끝으로 블랑팡 르 브라쉬 매뉴팩처 투어도 어느덧 막을 내렸습니다. 3시간 가량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둘러보기엔 다소 벅찬 감도 없지 않았지만, 르 브라쉬 매뉴팩처의 진면목과 숨은 가치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외관이 거창하고 요란하진 않지만 진정한 하이엔드 시계가 제작되는 특별한 장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의미가 있었으며, 이번 방문을 계기로 블랑팡의 컬렉션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국내 시계애호가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블랑팡의 매뉴팩처가 타임포럼 방문기를 통해 조금은 더 가깝고 친숙하게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