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mdoc 36513  공감:12 2025.05.06 00:19

 sundialfeatured-11142022.jpg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 이라는 가장 큰 자연현상을 측정하기 위해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물시계나 해시계, 천문 관측 등 비교적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시간측정 방식을 사용해 왔습니다. 

 

22_CM0A0529.jpg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나 드디어 '기계' 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시간측정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인류의 역사에서 불과 수백년 안팍의 짧은 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Clock-16-Verge-and-Folio-Wind-up-p1.jpg

 

대략 13세기 무렵부터 등장하는 이 기계식 시계는 상당히 최근까지 그 진화 양식에서 하나의 큰 흐름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형화' 였습니다.

 

ibr-2183643.jpg

 

대성당이나 도시의 큰 건물에 설치해야 될 정도의 대형 시계에서, 

 

marine-chronometer-kapak-.jpg

 

선박에 싣고 다닐 수 있을정도의 크기까지, 

 

Screen-shot-2013-11-13-at-2.01.0.jpg

 

그리고 사람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회중시계 크기까지... 

기계식 시계는 정확성 향상과 컴플리케이션에 의한 외연 확장이라는 발전 외에 '소형화' 라는 한결같은 진화의 방향성을 유지했습니다.

  

Dumont-Cartier-Pilot-Watch-the-f.jpg

 

그리고 인류는 마침내 손목에 올릴 수 있을 정도까지 기계식 시계의 소형화에 성공했죠. 

'작게, 더 작게', 그리고 결과적으로 '얇게, 더 얇게' 라는 이 진화의 메인 스트림은 1925년 마침내 그 정화를 탄생시킵니다. 

 

17-PP-Calatrava.jpg

 

1925년에 프레더릭 피게(Frederic Piguet, 현 블랑팡 메뉴펙쳐)에 의해 FP Cal.21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1.74mm의 울트라 슬림 무브먼트인 Cal.21은 이제 전통적인 진화 방식으로는 Cal.21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세월로 증명해 냈습니다.

 

vc-calibre-1003-2010.jpg

 

FP Cal.21의 기록은 20년 뒤 AP/VC의 의뢰를 받은 JLC 803에 의해 깨지게 되는데(1.64mm)...

이 20년의 간극이 스위스 시계업계의 특허 만료 기간 20년과 일치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현재 스위스 시계업계에서는 울트라 씬 경쟁이 치열합니다.

전통의 피아제에 이어 신입 강자 불가리, 여기에 난데없이 참전한 RM까지 엎치락 뒤치락 혼조세인데요...

어이없는게 이들 신(新) 울트라씬 시계들은 얇기의 기준이 무브먼트가 아니고 시계 자체, 즉 케이스의 두께입니다...ㅡ,.ㅡㅋ

 

fe7a0d457c32ac9367d40c4f581f8156.jpg

 

2020년 먼저 포문을 연 피아제의 알티플라노 얼티메이트 컨셉(Altiplano Ultimate Concept)의 케이스 두께가 2mm였고,

  

3463988c17d492bf84df8a2504bff6ba.jpg

 

2022년 불가리가 이걸 옥토 피니시모 울트라(Octo Finissimo Ultra)의 케이스 두께 1.8mm로 깨버리자,

  

fb461c75581f2fccb1ad6a390b0be6a5.jpg

 

그해 바로 RM이 뜬금없이 난입, RM UP-01 페라리(Ferrari)의 케이스 두께 1.75mm로 다시 기록을 경신해 버린거죠...

 

DUK_Web_01_Konstantin_Chaykin_ne.jpg

 

그리고 2024년 9월, 콘스탄틴 샤이킨이라는 러시아 출신 독립시계제작사가 씬킹(ThinKing)이라는 1.65mm 케이스의 울트라씬을 내놓음으로서 울트라씬 전쟁은 현재 진행형임을 알립니다. 

2103354_sw6_case_medium.jpg

 

무브먼트 두께만 1.74mm인 FP Cal.21은 전통적인 케이싱을 거치면 대략 5mm 정도의 케이스 두께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2020년대의 이들 울트라 씬 신(新) 4인방은 Cal.21의 기록을 아득히 갱신해 버린 어나더 레벨같은 존재들인 것이죠.

 

1925년에 등장, 이제 어언 100살이 되어가는 이 노병(Old soldiers)은 이렇게 패배해서 죽어버리는 것인가...

 

하지만...

Old soldiers never die...

누구 말마따나 노병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이죠... 

 

FP Cal.21은 수백년간 진행되어진 기계식 시계의 소형화 진화의 마지막 이정표였고,

 

요즈음의 이 신(新) 울트라 씬 시계들은 FP Cal.21과는 다른 새로운 진화 계통의 다른 종(種)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진화의 시작은 FP Cal.21의 등장 20년 후 그 기록을 깬 AP 2003(= VC 1003 = JLC 803) 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장 라셀Jean Lassale이 기반을 마련하고,

모리스 그림(Maurice Grimm)과 앙드레 베이너(Andre Beyner)에 의해 완성되어

마침내 오늘날,

2020년대에 그 꽃을 피우게 된겁니다.

  

즉, 무브먼트 두께가 아닌 케이스 두께로 경쟁하는 현대의 이 괴물같은 무브먼트들은 FP Cal.21과는 완전 다른 세계관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Cal.21과의 병렬적인 비교는 불가(不可)하며 Cal.21의 존재는 여전히 한 진화 계통의 최종 결과물을 보여주는 마스터피스로 오롯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100년이 다 되어가는 Cal.21이 왕년의 영광만을 추억하는 퇴물이 아닌, 다만 잊혀진 전설임을 확인하려면 Cal.21에 대한 서술보다는 피아제, 불가리, RM의 새로운 울트라씬 시계들이 Cal.21과는 어떻게 다른 이질(異質)적인 존재들인지에 대한 고찰이 먼저 필요합니다.

  

InShot_20210218_182754887.jpg

 

새로운 존재의 시작은 1946년 등장한 AP의 Cal.2003부터 시작됩니다.

 

VC 1003, JLC 803으로도 불리우는 이 무브먼트는 AP/VC의 의뢰를 받은 JLC에 의해 탄생했으며, JLC는 FP Cal.21의 기록을 깨기 위해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특별한 방식을 써야만 했습니다.

 

당시 FP는 Cal.21을 통해 플레이트와 브릿지, 나사의 크기를 물리적 한계까지 줄여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Cal.21을 뛰어넘기 위해서 더 줄일 수 있는 두께는 태엽통의 두께 뿐이었습니다.

태엽의 폭은 일정 수준의 토크와 리저브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재료공학 기술로는 더이상 줄일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fp21_180_1_1024x1024@2x.jpg

fp21_180_2_1024x1024@2x.jpg

 

이런 태엽통의 두께 감소를 위해 FP는 Cal.21의 위, 아래 태엽통 뚜껑 중 다이얼쪽 뚜껑을 날려서 두께를 줄이는데 성공했습니다. 

 

P1016050.JPG상단의 사진은 FP Cal.71의 태엽통 사진입니다. 태엽통의 뚜껑이 없이 태엽이 노출되어 있는게 보입니다.

FP Cal.21은 반대쪽 다이얼 사이드의 태엽 뚜껑이 없어 무브먼트 사이드에서는 뚜껑이 없는게 관찰되지 않습니다.

 

fp21bp.jpg

vacheron1003_100_1_grande.jpg

 

JLC는 이런 태엽통의 두께를 줄이기 위해 메인 플레이트를 없애기로 합니다.

위 사진 상단이 FP21, 하단이 VC 1003의 메인 플레이트 사진입니다.

VC 1003 에서는 태엽통 들어가는 부분이 아예 뚫려있는게 관찰됩니다.

 

mainspringbarel.jpg

 

따라서 전통적인 시계는 태엽통의 아버(Arbor; 고정축)가 아래는 메인 플레이트, 위는 브릿지로 고정되는대 비해 VC 1003의 태엽통은 위에서 브릿지로만 고정되게 됩니다.

 

이런 기술을 둥둥 떠있다, 메달려 있다 라는 뜻으로 플로팅 배럴Floating Barrel, 또는 행잉 배럴Hanging Barrel 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새로운 기술은 아니고 회중시계 시대에 두께를 획기적으로 줄였던 레핀Lepine이나 브레게Breguet가 이미 사용하던 기술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걸 작은 손목시계 무브먼트에 도입해서 전체 태엽통을 브릿지와 다른 기어와의 연결로만 지탱하는건 대담한 도전이었습니다.

VC 1003은 이런 시도로 태엽통의 두께를 유지하면서 전체 무브먼트의 두께를 줄여서 FP Cal.21의 벽을 깨고 두께 1.64mm를 달성 하였으며, 

 

이는 이후에 펼쳐질 새로운 진화를 위한 유전자 변형의 시작이었습니다.

 

1970년대, 장 라셀Jean Lassale 이라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워치메이커 피에르 메티Pierre Mathys는 울트라 씬의 벽을 깨기 위해 VC 1003의 이러한 플로팅 배럴 기술에 주목하게 됩니다.

 

 플로팅 배럴 기술을 통한 두께 절감의 핵심은 태엽통을 덮은 플레이트의 제거를 통해서였고, 피에르 메티는 이런 플로팅 배럴 기술을 태엽통 뿐만 아니라 다른 기어들로 확대, 상당 부분의 무브먼트 구조에서 대부분의 브릿지를 제거, 기어들을 메인 플레이트에 파묻어 버린 것입니다.

 

19800849-js72egwrgij16oi3pcf3ixu.jpg

 

위 사진이 장 라셀의 Cal. 1200 입니다. 분해되지 않은 완전조립 상태의 무브먼트 임에도 무브먼트에서 관찰되는 브릿지는 밸런스휠 브릿지 하나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들의 기어는 메인 플레이트와 브릿지에 의해 위아래로 고정된 피봇에 꽂혀 돌아갔습니다.  

Jean Lassale Cal.1200으로 명명된 이 무브먼트는 브릿지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고정된 피봇을 중심으로 하는 기어의 회전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Cal.1200의 기어는 볼 베어링Ball Bearing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피에르 메티는 기어를 메인 플레이트에 파묻고, 기어 주위에 작은 볼 베어링을 집어 넣어서 회전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오로지 울트라 씬의 벽을 깨기위해 만들어진것 같은, 1970년대 스위스 시계업계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이 괴물같은 무브먼트의 두께는 1.2mm 였습니다.

 

브릿지의 삭제와 볼 베어링 방식의 사용으로 내구성과 수리가 상당히 어려웠던 이 무브먼트는, 무브먼트 자체의 결함과 쿼츠 파동에 맞물려 역사속에서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Jean Lassale도 브랜드가 갈갈이 찢겨져서 팔려갑니다. 

 

14649837906_c817fa55d3_b.jpg

 

Jean Lassale 이라는 브랜드 네임은 스위스 시계업계를 찢어놨지만 정작 늘 스위스 시계브랜드를 동경하던 세이코로 팔려나가 '유산은 명백하다(The Heritage is Obvious)' 라거나 '카트린 드뇌브 같은 여인을 위하여(For Women like Catherine Deneuve)'...라는 다소 이상한 판매문구로 얼굴마담 노릇을 하다 버려졌고...

 Piaget20P-1-9805_copy.jpg

그나마 Cal.1200의 무브먼트 권리와 생산시설은 르마니아(Noubelle Lemania SA)로 팔려갔다가 최종적으로 평소 2mm 이하의 초박형 무브먼트를 탐내던 피아제가 소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Cal.1200이 움직이기 시작한 새로운 진화의 수레바퀴는 그대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일본의 쿼츠 기술은 스위스만을 위협한 것이 아닙니다. 

 

쿠바 태생의 그린버그Gedalio 'Gerry' Grinberg는 미국으로 망명한  후 시계 유통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61년 NAWC(North American Watch Co.)를 설립한 그는 피아제Piaget와 코룸Corum의 독점 판매권을 따내고 미국 시계 마켓팅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사실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피아제를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 로 광고함으로서 미국에서 고급 시계를 성공의 상징으로 마켓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린버그로 인해 시계를 그저 '고등학교 졸업 선물' 정도로 인식하던 미국인들이 손목 위의 시계를 마치 캐딜락을 소유하는 것 만큼이나 빛나는 성공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전설적인 FP21이나 VC 1003 만큼은 아니지만 2mm 수동 9p와 2.3mm 자동 12p 무브먼트를 소유하고 있던 피아제Piaget는 그린버그의 강력한 마켓팅으로 미국에서 울트라씬 고급 시계의 대명사로 인정받았고,

 

그린버그는 많은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자 일본의 쿼츠 기술력은 점점 발달해서 상품화, 대중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왔고, 특히 지금까지 고급시계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울트라씬 분야에서 강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979-Citizen-79-1-Catalog-Exceed.jpg

 

1978년 5월, 씨티즌이 0.98mm의 말도 안되는 두께의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 4.1mm 케이스 두께를 가지는 '익시드 골드Exceed Gold'를 출시했고,

같은해 7월에는 세이코가 0.9mm의 쿼츠 Cal. 9320을 개발, 2.5mm의 얇은 두께케이스의 시계에 탑재해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NYT_1978_11_26-Seiko-Ultra-Thin.jpg

 

특히 세이코의 시계는 티파니 매장에서도 판매했기 때문에 고급 시계의 미국 유통을 꽉 잡고 있던 그린버그의 지위를 명백히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1967년 스위스 시계브랜드 'Concord'를 인수하여 자체 브랜드를 키우기로 회사의 운영 방침을 정했던 그린버그는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이 키운 미국의 울트라씬 고급 워치 시장을 지키기 위해 Concord 에서 사용할 최고의 울트라씬 쿼츠 무브먼트를 스위스에 주문하게 됩니다. 

 

NYT_1979_02_11-The-Battle-to-Bui.jpg

 

당시 쿼츠 위기로 휘청휘청대고 있던 스위스가 마침내 연합국 미국의 재정적 도움으로 울트라씬 전쟁에서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죠.

 

그린버그의 의뢰를 공식적으로 받은 업체는 당시 SSIH와 함께 스위스 시계브랜드를 양분하고 있던 ASUAG의 무브먼트 담당 브랜드 Ebauches SA. 였습니다.

 

Ebauches SA는 이 프로젝트의 명칭을 'Delirium Tremens(진전섬망; 이름이 상당히 골때리는데 진전섬망은 사망률 20~30%까지도 가는 정신과적 응급상황 입니다...ㅠㅜ)' 라고 명명하고 프로젝트 메니져로 앙드레 베이너Andre Beyner, 기술자로 모리스 그림Maurice Grimm을 투입합니다. 

 

앙드레 베이너의 아이디어는 장 라셀Jean Lassale의 Cal.1200 이었습니다. 브릿지를 생략하고 기어를 메인 플레이트에 다 때려박아 버리자는 것이었죠. 단, 여기에 메인 플레이트도 없애버리구요...

 

뭔소리냐구요? 

 

일본 애들처럼 모범적으로 무브먼트 만들고, 그걸 케이스에 구겨넣고, 그 위에 다이얼 올려놓으면 어느세월에 더 얇은 시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뒷케이스를 메인 플레이트 삼아 기어와 배터리를 때려넣고, 그 위에 다이얼을 브릿지 삼아 덮으면 단 3개의 레이어로 시계를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였죠.

 

모리스 그림이 이 정신나간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했습니다. 

 

이 모처럼만의 반격에 모든 스위스 브랜드들이 들고 있어났습니다.

 

전체 시계는 Ebauches SA에서 생산되었으며, 당시 SSIH에 속해있던 ETA가 생산 지원에 나섰습니다.  

 

423px-Concord_Watch_2.jpg

 

1979년 1월 12일, 의뢰주 그린버그의 브랜드 Concord에서 이 시계가 공개되었고, 'Delirium'...우리말 그대로 섬망, 착란을 뜻하는 이름으로 명명된 이 시계는 말 그대로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 줬습니다.

 

케이스 두께가 1.98mm 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 

 

EUROPASTAR_EUROPE_119_1980_005_0.jpg

 

이 기록은 몇개월 단위로 경신되어 6개월 뒤에 발표된 Delirium II는 1.43mm의 케이스 두께였고,

  

Concord-Delirium-IV.jpg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Delirium IV는 0.98mm의 정신나간 두께를 보여 주었습니다.

 

Delirium의 판매는 Concord 외에 스위스 3개 브랜드에서 지원에 나섰습니다.

 

EJW_168_1979_005_0040-Longines-D.jpg

036478cf-27a1-4abb-8c03-1469292c.jpg

IWC_Quarz.jpg

 

Eterna 에서는 'Espada' , Longines 에서는 'Feuille d'Or' , IWC 에서는 ref.3000 'Quartz' 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모두 11,000개의 Delirium 시계가 판매되었으며, 당시 판매 단가가 $4,500을 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업적으로 괜찮은 성공이었습니다.

 

특히 Concord는 Delirium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서, 당시 유명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 손목에 Concord를 올리는 마켓팅 비용으로 연간 1,400만 달러를 지불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Delirium은 스위스 시계 브랜드에게 있어서 가치를 메길 수 없는 명예로운 승리였습니다.

 

스위스가 일본과 경쟁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준 값진 승리였죠.

 

 

 

마침내 거둔 작은 승리에 고무된 Ebauches SA의 CEO 에른스트 톰케Ernst Tomke는 Delirium을 보다 실용적이고 값싼 시계로 기획해 볼것을 지시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Delirium Vulgare(Vulgare; '대중적으로' 라는 뜻의 라틴어) 라고 명명되었고,

 

여기에는 Ebauches SA의 저가시계 전문가 엘마 목Elmar Mock과 자크 뮐러Jacques Muller가 배정되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값싼 소재로 플라스틱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구조적인 컨셉은 Delirium과 동일했습니다. 

 

schnaps-idc3a9e-1.jpg

 

위의 사진이 엘마와 자크가 에른스트 톰케에게 가져간 시계 스케치 입니다. 

 

케이스 바닥에 무브먼트 부품을 고정하고, 그 위에 방수를 위해 아크릴 글라스를 용접했습니다. 수리는 불가능했고, 쓰고 고장나면 버리는 시계였죠. 대신 저렴한...

 

처음에는 누구도 거대한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든 엘마 목과 자크 뮐러도, 컨셉을 지시한 에른스트 톰케도요...

 

기술과, 가격과, 마켓팅이 결합했습니다. 

 

이 시계는 1983년 3월 1일 정식 출시되었고,  

 

마켓팅 컨셉은 "저렴하지만 첨단 기술을 사용하며, 디자인은 예술적이고 감성적인 시계를, 캐쥬얼한 1회용 액세서리 개념으로 판매한다" 였습니다.

 

1983년 50 CHF(스위스프랑)로 판매한 이 시계는 출시 당해 100만개가 팔려서, 이듬해 판매 목표를 250만개로 올려 잡아야만 했습니다. 

 

이 시계로 스위스는 스위스 기계식 시계 제조사들이 잃었던 입문용 시장을 되찾았고, 세이코, 씨티즌에게 빼앗겼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올 수 있었습니다. 

 

1983-Swatch-Ad-USA.jpg

 

두번째(Second) 시계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 시계의 이름은 바로 스와치Swatch 입니다! 

 

 

 

자...여러분은 이제 케이스 두께 0.98mm 까지 가는 정신나간 초박형 시계 전쟁의 승자가 사실은 '스와치' 였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위스 시계공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기계식 시계를 접하고, 사용하고, 만지고, 수리하다가 마침내 밥벌어먹는 수단까지 시계로 삼아버린 스위스 시계공에게...

 

마치 진정한 국밥충이라면 제육볶음과 돈까스로 외도를 하더라도 결국은 국밥으로 회귀하게 되는것처럼...

 

쿼츠로 외도를 하더라도 그들에게 있어 시계란 결국 '기계식' 시계인 것입니다.

 

Delirium을 만든 두 콤비, 앙드레 베이너와 모리스 그림도 '진짜' 시계는 기계식이라고 생각하는 스위스인들이었고,

 

그들은 Delirium의 구조 원리를 기반으로 초박형 자동 시계를 기획합니다. 

 

Delirium의 '기계식' 버젼인거죠.

 

기계식 시계로서는 최초로 무브먼트가 메인 플레이트 없이 케이스백에 삽입되었으며, 풀 로터를 사용할 공간과 높이를 절약하기 위해 15도의 제한된 스윙각도를 가진 범퍼식 로터를 체택했습니다.  

 

이런 무브먼트와 케이스의 일체형 구조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방전가공(EDM; Electrical Discharge Machining)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기계식 시계에서도 확실히 스위스 산골짜기에서 기어깍던 노인의 시대는 지났다는 이야기죠...

 

관련 특허까지 받았지만 Ebauches SA는 이 기획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bauches SA는 이런 기계식 초박형 시계를 받아줄 수 있는 고급 시계 수요가 완전히 고갈되었다고 판단하였으며, 특히 Ebauches SA는 완성시계 제조사가 아니라 무브먼트 제조사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앙드레와 모리스는 두 국밥충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06-disruptive-thinking-800x533-1.jpg

 

오히려 그들의 아이디어에서 더 나갔습니다. 무려 울트라씬 자동 뚜루비용 시계를 만들어 버린겁니다. 

 

1983년, 그들은 위 사진의 '실제' 작동하는 시제품을 만들고 판매를 위해 AP를 방문합니다. 

 

Ultrathin, Tourbillon...

 

모두 고급시계의 상징입니다.

 

1b896ea42cf86f19c5b43f0c42ee6928.jpg

 

판매 보다는 '명예'를 위해, 그리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젠타의 RO를 출시했던 진취적인 브랜드 답게, AP는 앙드레와 모리스의 이 아방가르드한 시계를 생산합니다. 

 

8452a05caa8ed737f6a76183e8d1cfad.jpg

 

1986년 처음 나온 AP의 Ultrathin Tourbillon ref. 25643은 태양신 '라Ra' 의 햇살을 묘사한 이집트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다이얼에 의해 '라Ra' 로 명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무브먼트의 이름...2870의 이름을 따서 AP 2870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두께 4.8mm에 이 시대를 앞서가는 시계는 20년에 걸쳐 350개가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1986년 당시 손목시계용 뚜루비용은 단지 20여개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 

 

350개의 판매량은 지난 2세기동안 판매된 뚜루비용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AP에게 매우 명예로운 시계였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있어 이 AP 2870은, 그리고 이 글에 있어서 AP 2870의 의미는,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되던 울트라씬의 끝을 알린 이정표가 FP cal.21 이라면...

 

AP 2870은 울트라씬의 새로운 종(種)으로 완벽하게 탄생한 Delirium을 기계식 시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새로운 이정표라는 것입니다.  

 

 

 

1986년 AP 2870을 시작이자 끝으로,

 

새로운 울트라씬 Delirium의 후계자가 나타날 때 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고급 시계 수요가 되살아나고, 초박형 기계식 시계를 Delirium 방식으로 만들기 위한 가공 방식과 소재 기술의 발달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겠죠. 

 

Piaget-Introduces-The-Altiplano.jpg

 

그리고 마침내 그 기나긴 잉태기간을 깨고 새로운 후계자로 제일 먼저 박차고 나온게 '피아제Piaget' 라는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일찌기 미국에서 그린버그에 의해 Ultrathin 고급시계 시장을 평정하고,

 

새로운 종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장 라셀Jean Lassale의 Cal.1200의 특허 권리를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고,

 

이 장대한 서사의 한켠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스토리를 소유하고 있는 Ultrathin의 명가이니까 말이죠. 

 

 

 

foulkes-octoberc.jpg

 

피아제의 알티플라노 얼티메이트 컨셉, 불가리의 옥토 피니시모 울트라, RM의 UP-01 페라리...

 

konstantin-chaykin-thinking-hero.jpg

 

그리고 가장 최근의 콘스탄틴 샤이킨의 씬킹까지...

 

이들 신(新) 울트라 씬 시계들은 모두 같은 진화계통을 공유하는 유전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한가지 목적만을 위해 진화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한 호불호가 뚜렷히 갈리는 독특한 외양,

 

울트라 씬 와치의 숙명인 유리몸을 넘어서는 쿠크다스급 내구성,

 

크라운의 부재로 인한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는 와인딩, 시간셋팅 방식 등이 그것입니다.

 

 

 

P1015618.JPG

 

자...그럼 이제 사심을 가득 담아 이들과는 유전적으로 완전히 다른, 탄생한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 노병, FP 21을 한번 살펴볼까요?

 

P1015630.JPG

 

500~600년의 진화과정으로 숙성된 1.74mm의 얇은, 하지만 앵글라쥐까지 감상할 수 있는 아쉽지 않은 두께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의 4분할 브릿지,

 

P1015841.JPG

 

무브먼트를 감싼 익숙한 케이싱과 어디선가 보아오던 수수한 다이얼, 그러면서도 고급스러운 아플리케 인덱스

 

P1015608.JPG

 

얇은 태엽때문에 저항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와인딩감,

 

P1015634.JPG

 

단순한 구조로 인한 정직한 조작감...

 

KakaoTalk_20250505_233910178.jpg

 

이 시계의 특별한 점이 느껴지는 때는 오직 얇은 케이스를 손목위에 얹었을 때의 착용감 뿐입니다.

 

그저 GOAT! Frederic Piguet Cal.21!

  

블랑팡은 2000년 이후 Cal.21을 탑재한 시계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병은, FP 21은 울트라 씬 전쟁에서 패배하여 스러진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울트라 씬 전쟁은 유전적 계통이 완전히 다른 이종들의 리그일 뿐,

 

Cal.21은 그저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쉬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간 다시 우리곁에 돌아와 저와 같이 Cal.21을 즐길 수 있는 분들이 많아지길 기원하며...

 

기나긴 글을 마칩니다...

 

PS 1) Ebauches SA의 울트라씬 프로젝트 'Delirium Tremens'는 사실 언어 유희에서 온 작명입니다. 불어로 « très mince » 가 '매우 얇음' 이라는 뜻이라는군요. 불어 très mince 를 영어 Tremens로 살짝 바꾼거죠...

 

PS 2) Delirium을 만든 watchmaker 모리스 그림Maurice Grimm 씨는 숨겨진, 매우 저평가된 장인입니다. 그는 오메가로 옮겨가서 1980년 오메가판 Delirium 'Dinosaure'를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3개의 뚜루비용을 제작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서술한 AP의 뚜루비용 cal.2870, 그리고 그를 너무나도 좋아한 AP는 나중에 그를 오메가에서 임대?해서 1991년 AP의 또다른 뚜루비용 cal. 2875를 제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뚜루비용이자 가장 유명한 뚜루비용이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오메가의 central tourbillon 입니다. 1994년 오메가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발표된 이 시계는 뚜루비용이 센터를 차지하고 있어 시침과 분침을 꽂을수가 없었는데요...이를 해결한 방법이 시침, 분침이 그려진 두장의 투명 사파이어판을 회전시키는 것이었고, 이 기술은 Delirium IV에서 그가 이미 사용했던 기술이었습니다.   

 

PS 3) 이 글은 짱총님의 타포 칼럼 밀리미터 전쟁 part 1, 2 https://www.timeforum.co.kr/TFWatchColumn/20432553 https://www.timeforum.co.kr/TFWatchColumn/20432570 과 링고님의 울트라슬림 심플와치-얇음의 미학 울트라슬림 심플와치 - 얇음의 미학 : 네이버 블로그 과 같이 읽으면 더 좋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감 수
공지 [공지] 매크로 먼데이 [39] TIM 2014.03.07 58076 11
Hot 야광없는 드라이빙 워치, 히스토릭 아메리칸 1921. [9] energy 2025.07.08 4202 1
Hot Darth One [10] 현승시계 2025.06.12 3168 5
Hot 250주년을 대하는 브레게의 자세 [10] 현승시계 2025.06.10 11635 6
Hot 일하기 싫은 요즘 - 곤돌로 5098p [16] 제이초 2025.06.04 11156 1
11274 바쉐론 콘스탄틴 오버시즈 크로노 청판 구입기!!! [14] file MadDog 2025.05.07 915 4
11273 GMT-MASTER II [4] file 클래식컬 2025.05.07 801 1
11272 VC1942(Historique1942) [21] file ClaudioKim 2025.05.07 1009 3
» Ultrathin Watches ; 노병은 죽지 않는다 [16] file mdoc 2025.05.06 36513 12
11270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스트랩 리뷰 | 브레이슬릿, 세일클로스, 러버, 나토 [4] file 클래식컬 2025.05.05 710 4
11269 [기추 선물] Urwerk UR-100V Full Titanium Jacket (Limited Edition of 25 Pieces) [1] file 먼개소문 2025.05.04 758 3
11268 [2개 기추] Chopard Alpine Eagle 41 XPS Chameleon Dial Ref. 298623-3002 & Alpine Eagle 36 Chameleon Dial Ref. 298601-2001 (Limited Edition of 15 Pieces) [3] file 먼개소문 2025.05.03 916 0
11267 MB&F M.A.D.Editions M.A.D.2 2개 기추 [5] file 먼개소문 2025.04.30 878 2
11266 트레디셔널 영입했습니다. [23] file 호랑이엔지니어 2025.04.29 834 5
11265 쇼파드의 메티에 다르, 우루시 다이얼 한정판 "개의 해" [30] file 시간의역사 2025.04.28 29376 8
11264 naple, Breguet [6] file board 2025.04.26 781 2
11263 브레게 250주년을 축하하며. ft. Hora Mundi [12] file 현승시계 2025.04.26 930 4
11262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42mm "스틸" 실사용 리뷰 [7] file 클래식컬 2025.04.24 906 4
11261 CODE 11.59 [9] file 오리야 2025.04.23 965 0
11260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두리안의 계절이 왔습니다. Feat 아쿠아넛 [8] file 홍콩갑부 2025.04.23 679 2
11259 WWG 외 행사와 제뎁 렉세피 공방 [4] file 쌍제이 2025.04.23 646 6
11258 봄을 알리는 비가 여름장마처럼 오네요.;;; [2] file energy 2025.04.22 596 1
11257 바티스카프 줄질 - 레이싱 스트랩 [6] file JLCMaster 2025.04.21 523 2
11256 피프티패덤즈 테크 [1] file 클래식컬 2025.04.19 894 0
11255 [스캔데이] M.A.D.2 by Eric Giroud [5] file 타치코마 2025.04.18 877 3
11254 여름이 늦게오길 바라며, American 1921 [14] file energy 2025.04.16 863 3
11253 비오는 날에 브레게 7337 블루 [18] file 현승시계 2025.04.14 833 4
11252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테크 오션 커미트먼트 IV 사용기 [14] file 클래식컬 2025.04.12 754 5
11251 브랜드대표 혹은 그렇지 않은 (+블랑팡 FF신제품 소식) [20] file energy 2025.04.10 1002 3
11250 손목에 올려보지 말지어다! [18] file S-Mariner 2025.04.10 1018 5
11249 골든 일립스는 매장에서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5] 오토로루 2025.04.08 798 0
11248 따뜻한 주말이네요 [14] file 말대구리 2025.04.06 864 2
11247 [WWG25] 파텍 필립 현장 스케치 & 신제품 Hands-On [2] file 짱총 2025.04.06 8342 2
11246 [스캔데이] 오랜만에 스틸 오디세우스 [15] file 현승시계 2025.04.05 786 3
11245 [WWG25] 바쉐론 콘스탄틴 트래디셔널 매뉴얼 와인딩 270주년 에디션 Hands-On [5] file 짱총 2025.04.04 1000 3
11244 [WWG25] 반클리프 아펠 현장 스케치 & 신제품 Hands-On file 짱총 2025.04.04 357 1
11243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오션 커밋먼트 IV file 클래식컬 2025.04.04 490 1
11242 [WWG25 외전] MB&F x URWERK x DEBETHUNE [6] file 타치코마 2025.04.04 845 4
11241 [WWG25] 바쉐론 콘스탄틴 현장 스케치 & 신제품 Hands-On [5] file 짱총 2025.04.02 975 2
11240 Moritz Grossmann Benu Heritage Hamatic [1] file 먼개소문 2025.04.02 89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