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월식(月蝕)이 있는 날이었다. 비록 구름에 많이 가려져 육안으로 달을 보지는 못했지만, 문득 시계 다이얼에 새겨진 달, 문페이즈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2012년 구매해 약 5년 남짓 차고 다녔던 Citizen Eco-Drive Moon-phase Ref. AP1011-58A. 속칭 "구형 문페이즈" 혹은 "구문페"라 불리는 시계가 있다. 당시 사회 초년생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던 모델인데, 시간·요일·월·달과 별까지 빼곡히 들어찬 다이얼은 마치 중세 유럽 회화 속 달력판 같았다. 지금 내 취향으로는 다소 번잡하지만, 그때는 그 아기자기한 복잡함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그래서 나도 약 30만원 내외에 구매해서 잘 차고 다녔다.

Citizen Eco-Drive Moon-phase
Ref. AP1011-58A, 일명 구문페
1. 인간이 쪼갠 시간의 조각들
시·분·초·요일·월·달이 모두 표기된 이 시계를 보며 인간이 만든 시간 단위를 곱씹었다. 우리는 보통 1초가 모여 1분, 1분이 모여 1시간, 1시간이 모여 하루가 된다고 여긴다. 달이 한 번 차고 기우는 약 30일이 1달이 되고, 12달이 모여 1년이 된다. 마치 mm가 모여 cm가 되고, cm가 모여 m와 km가 되듯 매끄럽게 맞물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관계는 전혀 깔끔하지 않다. 각 단위를 정의해 보면 더 분명하다.
- 일(日, 하루):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시간. 낮과 밤이 한 번 돌아오는 주기.
- 시·분·초(時·分·秒): 하루를 각각 24개, 1,440개, 86,400개로 등분한 것.
- 연(年, 한해):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 계절이 한 바퀴 도는 주기, 약 364.25일.
- 월(月, 한달): 양력에서의 달. 자연적 주기와 무관하며 1년을 28-31일씩 묶어 12개로 나눈 단위.
- 삭망월(朔望月): 달이 지구를 한 바퀴 공전하는 시간. 초승달에서 시작하여 보름달, 그믐달을 거쳐 사라지기 까지의 주기. 평균 29.53일. 음력에서는 그냥 이게 월(한달)이다.
여기서 시·분·초는 인위적으로 하루를 쪼갠 값이니 일(日)과 연결되지만, 나머지 연(年), 월(月), 일(日)은 애초에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1년이 꼭 365일이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지구의 자전·공전 속도가 달랐다면 1년이 200일이었을 수도, 400일이었을 수도 있다. 달의 공전 주기도 30일이 아니라 40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2. 양력과 음력: 같은 하늘, 다른 리듬
고대에도 사람들은 계절의 순환을 알고 싶어 했다. 1년이 며칠인지 알아야 언제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할 지 알 수 있으며 사냥이나 채집에서도 계절은 중요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계절의 주기를 반영하되 측정 가능한 천문지표를 통해 최대한 자연에 근접한 달력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달력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태양을 기준으로 계절의 주기를 먼저 재서 그것을 1년으로 정한 뒤 적당히 12개월로 나눈 양력(陽曆)이다. 다른 하나는 달이 차고 기우는 삭망월을 먼저 세고, 그것을 12개 모아 1년이라 정의한 음력(陰曆)이다. 순수 음력의 1년은 354일이라 365일 양력보다 11일 짧다. 그냥 두면 이 오차가 쌓여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에 장마가 오게 된다. 그래서 2~3년에 한 번 윤달[閏月]을 넣어 양력과 계절을 맞춘다. 우리가 흔히 음력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렇게 윤달로 보정된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을 말한다.
3. 절기와 윤달
윤달을 이해하려면 24절기를 알아야 한다. 절기(節氣)는 전통적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양력 개념이다. 지구 공전 궤도 360도를 네 등분하여 계절(봄·여름·가을·겨울), 각 계절을 다시 셋으로 나누면 소계절(예컨대 초봄, 중봄, 늦봄), 이 소계절의 초입부를 좁은 의미의 절기(節氣), 중심점을 중기(中氣)라 부른다. 초봄의 절기는 입춘, 중기는 춘분이다. 이렇게 지구 공전 궤도상에는 15도마다 하나씩 총 24개의 (넓은 의미의) 절기가 생긴다. 1년이 365일이라 함은 지구가 하루에 1도가 조금 안 되게 움직인다는 뜻이니, 15도 이동할 때 마다 만나는 절기는 이보다 살짝 긴 15.2일마다 돌아온다. 당연히 (좁은 의미의) 절기-절기간 혹은 중기-중기간 간격은 이의 두 배인 30일 혹은 31일이 된다.
음력에서는 한가지 법칙이 있다. 바로 "반드시 한 달에 최소 한 개의 중기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중기의 도래 간격이 약 31일인 데 반해, 음력 한 달은 29일 또는 30일이다. 따라서 어느 달에 중기가 거의 말일에 있었다면, 그 다음달은 절기만 있을 뿐 다음 중기는 그 다음달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면 저 규칙을 어기게 되어 그 달은 정상적인 달로 인정받지 못해 윤달이 되고. 그 다음달이 직전 달의 다음 달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윤달 보다는 빈 달 혹은 공월(空月) 정도가 더 적절한 이름 같다.)
4. 음력과 양력의 장단점
이처럼 음력은 귀찮고 복잡하다. 어떤 달이 29일인지 30일인지 매번 관측해야 하고, 윤달이 껴 있으면 12개월 후 내년의 오늘이 몇월인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임대차나 금전대차계약 만기일을 짐작하는 데도 불편이 있다.
그럼에도 음력이 수천 년을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달의 위상은 태양보다 관측이 쉽고, 오늘 날짜만 알면 오늘 밤 달 모양을 바로 알 수 있다. 야간 농사, 마을 축제, 어업활동에서 달이 밝은 보름밤을 아는 것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조수간만도 달의 인력과 직결되니 음력 달력이 유리했다. 윤달만 적절히 넣으면 양력의 계절성과 음력의 편리함을 동시에 취할 수 있었다.
반면에 양력은 훨씬 단순하다. 4년에 하루만 추가하면 끝, 계절성과 예측 가능성이 높아 행정·계약에 유리하다. 다만 오늘이 며칠인지로 달 모양을 알 수 없다는 점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양력의 ‘월’은 더 이상 달과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이름만 달, 月, month라 불리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5. 깔끔하지 못한 우주와 인간의 숫자들
1년은 365.242일. 이를 반올림(내림)한 365라는 수는 약수가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약수인 73은 소수라 더 나누기 불편하다. 음력 1년은 354일이라 양력과 11일 차이가 나고, 이를 맞추기 위해 19년에 7번 윤달을 넣는다. (이를 메톤 주기라고 한다.) 이렇게 숫자들이 영 깔끔하지 못한 것은 애초에 지구의 자전 및 공전, 그리고 달의 공전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 독립적 운동주기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만든 시간의 단위는 다 합리적일까? 일단 하루(日)을 잘게 쪼갠 시·분·초는 매우 깔끔하다. (다만 각 단위별 배수가 규칙적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mm와 cm와 m는 대체로 일관되게 10진법의 승수배지만, 시분초는 60진법과 24진법이 혼합돼있다. ) 반면에 인간이 정한 양력월의 경우 어떤 달은 28일, 어떤 달은 31일이다. 차라리 월 대신에 새로운 단위, 예컨데 데카(deca)를 만들어 홀수 데카는 36일, 짝수 데카는 37일씩으로 했다면 지금보다 편리했을 것이다.
더 순수하게 인간이 정한 7일 주(週)도 매우 불편하다. 2교대, 3교대 어느 쪽도 딱 나눠떨어지지 않고, 학원 수업도 월수금 반과 화목토 반으로 나뉘어 후자는 토요일에 집을 나서야 한다. 인간이 순수하게 만든 시간 단위들이 하필 가장 애매한 소수라니, 우주의 불규칙성보다 더 지저분해 보인다.
6. 동아시아와 한국인의 음력
동아시아가 서양에 비해 음력을 오래 쓴 이유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다른 동기였다. 첫째, 동아시아 음력은 계절을 반영한 태음태양력이라 실제로 매우 실용적이었다. 달과 해의 주기를 모두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불편한 윤달 계산은 정부가 맡았고, 백성은 그냥 달력을 받아만 보면 됐다.
둘째로, 달력은 통치의 상징이었다. 황제는 천자(天子)였고, 하늘의 질서를 관리하는 권위는 곧 정치 권력이었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구성원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서로마가 멸망한 중세 이후 상당 기간동안 봉건제와 도시국가 형태로 진행된 유럽사와 달리 동아시아는 일찌감치 중앙집권화되어 이같은 체계적 통치가 가능했다.
한중일 중에서도 유독 한국은 문화적으로 음력을 오래 붙잡았다. 양력 체계는 1896년 공식 도입되었지만, 생일·제사 같은 사적 영역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음력이 주류였다. 1900년대 초에도 학교 방학·개학일을 양력으로 공지하면 모두 잘 따라갔지만 (즉, 어떤 학생도 선생님의 개학일 공지가 음력 기준이었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생일만큼은 여전히 음력으로 챙겼다.
더 흥미로운 점은 생일과 같은 사적영역에까지 음력이 정착된 것은 대략 1990년-2000년 내외부터라는 사실이다. 국가가 별도의 계몽 캠페인이나 규제를 가한 것도 것도 아닌데 왜 100년 가까이 자리잡지 못했던 문화가 갑자기 자연스레 정착된 것일까.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1) 도입된지 한두 세대가 지나도 수용되지 않는 문화는 대체로는 폐기되며, 2) 만약 그것이 공적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면 다음 세대 즈음에는 사적 영역에서도 수용되기 시작하고, 3) 어느 순간 특정 세대에서 뒤늦게 수용됐다면 국가의 적극적 홍보나 강제성이 있었던 덕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있어 사적 영역에서의 양력은 이 경우 모두를 거스른다. 1) 도입된지 100년이 넘게 수용되지 않았지만 80년대생이 청소년이 된 '90년-2000년대 전후로 생일에 양력을 쓰는 문화가 우세해졌다. 2) 공적 영역으로는 이미 1900년대 초반부터 성공적으로 정착했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한참 늦었다. 3) 심지어 20세기 말즘에야 사적 영역에서 양력이 급격히 수용된 데에 딱히 뚜렷한 계기나 압력도 없었다.
7. 제사가 붙잡아온 100년의 음력
나는 2000년 전후의 이 급격한 변화가 제사 및 핵가족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제사나 생일은 다른 문화와 달리 좀 독특한 면이 있는데, 그것을 챙기는 주체는 다음세대지만 그 주인공은 윗세대라는 점이다. 예컨대 2010년대 스마트폰이 젊은세대에게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똑같이 문화 적응이 빠른 또래들 사이에서만 퍼져도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사나 생일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달력에 맞추어야 받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었고, 이것이 3대 이상 이어져가며 21세기에도 가족 경조사에 한해서는 음력이 살아남은 것이다.
80년대생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대부분이 조부모와 함께 살지 않게 된 세대이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할어버지를 중심으로 고향에 형제들이 더 이상 모여살지 않게 되었고, 자연히 제사 빈도도 줄어 음력을 유지하던 ‘끈’이 느슨해졌다. 여기에 장례 문화의 변화도 한 몫 거들었다. 화장률이 1990년대 초 20%도 안 되던 것이 2020년대 현재 95%에 달한다. 이제 80년대생들 대부분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성묘를 할 산소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음력 문화를 간신히 지탱하던 조상과의 연결끈인 제사와 장례문화가 바뀌며 80년대 생들은 설과 추석을 제외하면 음력의 존재를 깨달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이렇게 생활 속 음력을 겪은 적이 없는 80년대생들은 자신의 부모님들이 평소 직장에서 양력을 기준으로 사회생활 잘 하시다가, 왜 제사나 생일과 같은 가족사에 있어서만큼은 돌연 양력 도입 전인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시대로 돌아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8. 21세기 유교의 맹주 대한민국
그렇다면 왜 비슷하게 제사를 지내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한민국 만큼 음력을 챙기지는 않는가? 정답은 간단하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한국인들만큼 제사를 챙기지 않는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정작 문화대혁명과 공산화 이후 국가 단위로 음력 기준의 설날과 춘절을 보내지만, 개별 집안의 제사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일본은 애초에 중국과 한국만큼 유교의 영향이 강하지도 않았던데다, 메이지유신 이후 빠르게 양력으로 전환했다. 그나마 조상의 기일은 있더라도 절에서 양력 기준으로 법요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한국인은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오랑캐인 여진족에 의해 멸망하였으니, 이제 스스로를 유교문화를 보존할 사명을 띠고 있다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가졌었다. 그런데 20세기 중국이 스스로 유교를 버린 만큼, 21세기 대한민국은 소(小)중화도 아니고 그냥 전세계에서 제일 유교문화를 잘 보존하고 실천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2025년에도 각 집안마다 음력 기준 기일에 전국에 흩어진 형제들을 모아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타이완이나 베트남에 일부 그러한 문화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만큼 강하지는 않다.)
9. 문페이즈 시계같은 한국인의 시간
한국인은 일상에서는 철저히 양력으로 살지만, 설·추석·부처님오신날만큼은 여전히 달의 리듬을 따른다. 마치 문페이즈 기능이 있는 시계처럼 집 밖 학교나 직장에서는 시분초와 날짜 다이얼을 보지만, 조상님 제사와 부모님 생신에서 만큼은 문페이즈의 리듬을 따른다.

Frederique Constant FC-335MCNW4P6B
2022년경 구매했던 또 다른 문페이즈 시계
추석 연휴가 주말과 붙을지, 징검다리로 올지 매년 달라서 불편할 법도 한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 불규칙성을 즐긴다. “올해 추석 언제야?”라는 질문에 달력을 펴보는 것 자체가 작은 이벤트다. 마치 시계 다이얼 속 문페이즈 창의 달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듯이 말이다. 끝.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