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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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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그래프는 시계로 구현할 수 있는 복잡 기능 가운데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분야이지만 만만히 봐선 안됩니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확성을 요구합니다. 정확성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다음 단계인 계측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부정확한 시계로 계측을 한다 한들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뛰어난 정확성은 기본이고, 치밀한 설계와 구조에서 비롯되는 효율성, 내구성, 심미안 등 크로노그래프는 제조사의 종합적인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입니다. 무엇보다 크로노그래프는 투르비용, 스트라이킹, 퍼페추얼 캘린더 등과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시계를 빛내주는 주연으로, 때로는 다른 기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조연이 되어 열연을 펼치는 크로노그래프의 위상은 다른 어떤 복잡한 기능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크로노그래프는 고급 시계를 지향하는 브랜드라면 응당 갖춰야할 기본 소양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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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쉐론 콘스탄틴의 첫 번째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 Ref. 12090(1874년). 60분까지 측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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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년에 제작된 모노푸셔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 Ref. 11092. 
승마 애호가였던 아르헨티나 고객의 요청에 따라 케이스백에 에나멜로 기수를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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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와 테딩턴 천문대 크로노미터로부터 A등급 인증을 받은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 Ref. 11528(1913년)  

크로노그래프는 기계식 시계의 형태가 어느 정도 갖춰진 1816년에서야 등장했습니다. 여타 컴플리케이션과 비교하면 늦은 편이지만 진화의 속도는 가장 빨랐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발명한 이는 프랑스의 루이 모네(Louis Moinet)입니다. 지난 2013년 제네바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베일을 벗은 이 회중시계는 시간당 진동수가 무려 216,000vph(30Hz)였고, 다이얼 중앙에 꽂힌 바늘이 빠르게 회전하며 1/60초까지 계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인 1822년에는 니콜라스 뤼섹(Nicolas Rieussec)이 승마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의 기록을 측정하기 위해 크로노그래프 장치를 고안했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에나멜 다이얼 위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려 시간을 확인하는, 오늘날 통용되는 크로노그래프와는 사뭇 동떨어진 방식이었습니다. 1831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타데우스 비널(Joseph Thaddaeus Winnerl)이 스플릿 세컨즈 메커니즘을 고안합니다. 그의 시계는 크로노그래프 바늘을 정지시켰다가 다시 시작하는 와중에도 무브먼트가 작동을 멈추지 않는 최초의 크로노그래프였습니다. 1862년에는 스위스의 아돌프 니콜(Adolphe Nicole)이 하트캠을 사용해 크로노그래프 바늘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크로노그래프를 완성하며 현대 크로노그래프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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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에 거주하는 스위스인들이 이집트 국왕 푸아드 1세에게 선물한 회중시계 Ref. 11294(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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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아드 국왕의 아들 파루크 국왕의 회중시계.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를 포함해 총 14개의 기능이 한데 어우러진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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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미군 공병대에 제공한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은 1755년 창립 이래 워치메이킹이라는 드높은 산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감히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해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험준한 봉우리라 할지라도 제네바의 고매한 매뉴팩처에게는 도전과 정복의 대상이었습니다. 시계의 본질인 시간을 계측의 개념으로 확장한 크로노그래프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서명이 적힌 첫 번째 크로노그래프 시계는 워치메이커들이 크로노그래프 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1874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메종과 크로노그래프의 첫 만남이자 오랜 인연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간 켜켜이 쌓아 올린 명성에 힘입어 세계 도처에서 메종의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원하는 주문이 밀려들었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의 손자인 나폴레옹 왕자부터 이집트 국왕 푸아드 1세와 그의 아들 파루크, 미국 자동차 산업의 거부이자 시계 애호가였던 제임스 워드 패커드, 유명 컬렉터이자 은행가 헨리 그레이브스 주니어,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까지 유명 인사들이 앞다투어 바쉐론 콘스탄틴의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사들였습니다.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인 1918년에는 미군 공병대를 위해 특별한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를 납품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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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종의 첫 번째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 Ref. 1441(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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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모니 크로노그래프의 모태가 된 모노푸셔 투 카운터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 Ref. 11059(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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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롱런한 메종의 베스트셀러 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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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 능력과 항자성을 겸비한 최초의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 콘 드 바슈(Cornes de Vache) Ref. 11056(1955년)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 제작에 몰두하던 바쉐론 콘스탄틴은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권력이 이양될 조짐이 보인 1910년대가 되자 발 빠르게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를 선보입니다. 1917년에 출시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첫 번째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인 Ref. 1441은 케이스에 용접한 러그에서 알 수 있듯이 과도적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30분 카운터와 스몰 세컨즈를 좌우 대칭으로 설치하고 크로노그래프 초침으로 시간을 계측하는 투 카운터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바야흐로 손목시계의 시대가 열리자 바쉐론 콘스탄틴은 창조성과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독특한 디자인과 크로노그래프를 결합한 걸작들을 쏟아냅니다. 당시의 매혹적인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는 훗날 하모니나 히스토릭과 같은 메종의 컬렉션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바쉐론 콘스탄틴을 추종하는 애호가들에게 불멸의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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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버 3500을 탑재한 트래디셔널 울트라-씬 스플릿-세컨 크로노그래프 엑설런스 플래타인 컬렉션

크로노그래프에 대한 메종의 탐구열은 디자인을 넘어 무브먼트로 전이됩니다. 한동안 바쉐론 콘스탄틴은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명가 르마니아(Lemania)의 핸드와인딩 칼리버 2310을 모태로 한 칼리버 1141과 1142를 주력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컬럼휠과 캐링암 수평 클러치를 결합한 고전적인 무브먼트에 만족할 수 없었는지 제네바 홀마크까지 획득하며 성능과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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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버 5200/2를 사용한 오버시즈 크로노그래프 "에베레스트" 리미티드 에디션

260년이 넘는 역사에서 미루어 볼 수 있듯이 그들의 발끝은 이번에도 도전을 향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은 노하우를 긴 시간 속에 녹여낸 끝에 마침내 2015년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5200과 셀프와인딩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3500이 데뷔합니다. 전자는 3세대로 접어든 럭셔리 스포츠 워치 오버시즈의 크로노그래프 모델에, 후자는 하모니 울트라-씬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모델에 발탁됩니다. 칼리버 5200이 오버시즈의 젊고 스포티한 분위기에 부합하며 크로노그래프 컬렉션의 기초를 두텁게 했다면 칼리버 3500은 전통 공예 양식과 시계 예술에 방점을 둔 오뜨 오를로제리의 정수 그 자체였습니다. 칼리버 3500은 층층이 쌓아올린 복잡한 구조와 제네바 홀마크를 커버하는 마감이 압권입니다만 백미는 페리퍼럴(peripheral) 로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하이엔드 크로노그래프를 떠올리면 핸드와인딩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급 시계의 특성상 시계의 두께를 최대한 얇게 만드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로터를 도입하면 무브먼트가 가려지기 때문에 편의성을 포기하더라도 보는 즐거움을 해칠 순 없다는 고집이 매력으로 둔갑합니다. 편의성이라는, 고급 크로노그래프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부분 조차 놓치고 싶지 않았던 바쉐론 콘스탄틴은 핸드와인딩과 셀프와인딩 쌍방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전법을 씁니다. 칼리버 3500은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신비를 여과 없이 노출시키기 위해 무브먼트 외곽을 따라 회전하는 페리퍼럴 로터를 채용했습니다. 화려한 마감과 독특한 구조의 페리퍼럴 로터는 편리함은 물론이고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며 칼리버 3500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복잡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두께는 5.2mm에 그쳐 울트라-씬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고야 말았으니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에서 이 이상을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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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가지 기능으로 무장한 Ref. 57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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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3개의 부품과 24개의 컴플리케이션을 담은 캐비노티에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 템포

지난 2015년 창립 260주년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Ref. 57260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회중시계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바 있습니다. 크로노그래프를 포함해 57개의 기능을 총망라한 그야말로 바쉐론 콘스탄틴의 역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5년 뒤인 2020년 바쉐론 콘스탄틴은 다시 한 번 시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깁니다.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를 비롯해 퍼페추얼 캘린더, 미니트 리피터 등 무려 24개의 기능을 집약한 캐비노티에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 템포(Les Cabinotiers Grand Complication Split-seconds Chronograph – Tempo)를 완성해냅니다. 우리가 손목시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능을 담아내며 가장 복잡한 회중시계에 이어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까지 제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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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종의 상징인 말테 크로스를 형상화한 컬럼휠

크로노그래프라는 이름을 빌려 탄생했던 육중한 계측 장치는 손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침투할 정도로 진보했으나 중요성이나 실용성은 예전만 못합니다. 과거처럼 필드에서 활약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더 정확하고 편리한 도구들이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대체한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애호가들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이유는 크로노그래프가 기계식 시계 발전의 기록이며 천문, 의학, 과학, 스포츠 등 인류 문명의 발달과 함께해온 산증인이자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을 가장 우아하게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크로노그래프를 향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관심과 열정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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