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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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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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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 어디서 봤더라...

글이나 영상 따위를 편집하여 하나의 완성품으로 만드는 것을 짜깁기라고 합니다. 으레 이것저것 끼워 맞춘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교묘한’, ‘악의적’, ‘무분별한’과 같은 형용사가 따라 붙을 때가 많습니다. 시계에도 짜깁기가 있습니다. 유명 모델의 성공 공식을 자사 제품에 대입하는 일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사건의 용의자는 주로 염가의 패션 브랜드입니다. 특허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디자인을 가져다 쓰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따가운 눈총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표절이나 모방에 불과하다는 꼬리표는 덤입니다. 이들의 의도는 단순하고 노골적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의도를 갖고 계획적으로 짜깁기를 저지르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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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열린 국제 고급 시계 박람회(SIHH, 현 워치스앤원더스)를 앞두고 H. 모저 앤 씨(H. Moser & Cie)는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출품한 시계가 문제였습니다. 시계의 이름은 스위스 아이콘스 워치(Swiss Icons Watch). 시계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스위스 아이콘스 워치가 여러 유명 브랜드의 제품을 짜깁기한 것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케이스는 위블로의 빅뱅, 팔각형 베젤은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24시간이 새겨진 투톤 베젤 인서트는 롤렉스의 GMT-마스터II, 크라운 가드는 파네라이, 가로로 패턴이 새겨진 다이얼은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 샌드위치 다이얼은 파네라이, 바늘은 브레게, 폰트는 IWC, 투르비용 브리지는 지라드 페리고의 골든 브리지에서 가져왔습니다. 단 하나만 제작된 괴이한 시계는 "프랑켄슈타인 오마주(Frankenstein Homage)" 워치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워치는 부품을 바꿔치기 하거나 커스텀을 하고자 여기저기에서 부품을 조달해 조합한 것을 의미합니다. H. 모저 앤 씨의 CEO 에드워드 메일란(Edouard Meylan)은 시계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 대신 과대 광고와 마케팅에 열중하는 스위스 고급 시계의 행태를 비판하고 자성을 촉구하기 위해 스위스 아이콘스 워치를 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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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취지에 공감한 이들에게는 통쾌한 사건이었겠습니다만 짜깁기의 대상이자 저격을 당한 스위스 시계 업계의 주류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이들은 곧바로 불편한 심기를 H. 모저 앤 씨에 전달했고,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샤프하우젠의 패기 넘치는 독립 브랜드는 광역 도발을 시전한지 불과 몇 일 만에 백기를 들었습니다. 홍보 활동을 즉각 중단하고 제품 공개 및 판매 계획까지 철회했습니다. 자신들의 의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해석된 것이 아쉬웠겠지만 어찌됐건 H. 모저 앤 씨는 청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짜깁기를 바라보는 기존의 부정적 입장을 뒤집는데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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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반대로 얼마 전 온라인으로 개최된 LVMH 워치 위크(LVMH Watch Week 2021)에서 제니스(Zenith)가 선보인 크로노마스터 스포츠(Chronomaster Sport)는 짜깁기도 잘만 하면 비난 대신 박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합니다. 브랜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엘 프리메로(El Primero)를 탑재했다는 점에서 봤을 때 그저 제니스의 여러 크로노그래프 시계 가운데 하나로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한 발짝 물러서서 차근차근 살펴보면 여러 제품이 녹아 있는 용광로 같은 시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니스에 따르면 크로노마스터 스포츠에는 총 6개의 헤리티지 모델의 특징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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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노마스터 스포츠에 영감을 준 역대 엘 프리메로

우선 제니스를 대표하는 삼색(블루, 안트라사이트, 라이트 그레이) 스리 카운터 다이얼을 비롯해 전체적인 케이스 디자인(날렵한 러그, 펌프 푸셔 크로노그래프 버튼) 그리고 4시 방향의 날짜 창은 엘 프리메로의 전설을 알린 1969년작 오리지널 엘 프리메로(Ref. A386)에서 차용했습니다. 1/10초까지 측정할 수 있는 블랙 세라믹 베젤 인서트는 1968년에 출시한 프리 엘 프리메로 Ref. A277(닷 마커), 1988년에 출시한 엘 프리메로 데 루카 크로노그래프(딥 블랙), 1992년 엘 프리메로 레인보우 크로노그래프(타키미터 스케일 대신 1/10초 카운터로 대체), 2012년 엘 프리메로 스트라토스 스트라이킹 10th(세라믹)의 특징을 하나로 엮어 완성했습니다. 슈퍼 루미노바를 살짝 도포한 입체적인 인덱스는 오리지널 엘 프리메로를 복각한 크로노마스터 리바이벌 A386의 것을 가져온 겁니다. 끝으로 전체적인 디자인과 실루엣은 여섯 모델의 디테일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마무리했습니다.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의 역사, 엘 프리메로가 걸어온 길을 유유히 따라 걷는 듯한 기분마저 드는 크로노마스터 스포츠는 선배들의 특징을 한데 모아 뒤섞었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질서정연하게 정립함으로써 좋은 짜깁기의 선례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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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외부에서 탐색한 H. 모저 앤 씨와 스스로를 대상으로 삼은 제니스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어느 정도 무리가 있습니다만 의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타당한 논거와 설득력이 수반되느냐에 따라 짜깁기는 다른 판결을 선고 받을 수 있음을 두 사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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