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acheron Constantin Traditionelle
Ref. 87172/000J-9512
Automatic Date
바쉐론 콘스탄틴의 트래디셔널 컬렉션 오토매틱 데이트 Ref. 87172/000J는 여러모로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 우선, ‘트래디셔널’이라는 컬렉션 자체가 흥미로운데, 그중에서도 이 시계는 기본 논데이트 수동 모델이 아니라 비대칭적으로 배치된 데이트 창과 자동 무브먼트가 결합된 비주류에 해당한다. 게다가 2010년대 이후 금장 시계의 주류를 차지하는 로즈 골드나 화이트 골드가 아닌, 고전적인 옐로 골드 케이스를 채택해 더욱 독특하다.
특히 이 옐골드와 관련하여 나 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주얼리나 액세서리로서 옐로 골드 소재를 다소 생경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들은 로즈골드나 화이트골드가 주류가된 2000년대 이후 주얼리를 접했기에, 전통적인 노란빛의 옐로 골드는 올드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심지어 일상에서 접하는 골드라기 보다는 디즈니 만화 속 금은보화나 헐리우드 영화의 금괴 이미지와 겹쳐 연상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영국의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서양철학을 이렇게 정의했다.
The general characterization of the western philosophy is that it consists of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
(유럽 철학 전통을 일반화하자면, 플라톤에 대한 각주들이라 할 수 있다.)
즉, 방대한 철학사조차 결국 플라톤의 문제의식과 언어에서 뻗어나간 주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시계라는 작은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날 수많은 다이버, 파일럿, 드레스워치들이 난무하지만,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20세기 초 까르띠에 산토스, 더 나아가 회중시계에 도달한다. 즉, 오늘날의 신제품 경쟁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창조보다는, 과거 전통의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느냐의 싸움이다.

흥미롭게도 기계식 시계는 기술적 진보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쿼츠, 스마트워치가 정밀성·편의성에서 압도하는 21세기에 굳이 태엽과 톱니바퀴에 집착한다는 건 비합리적이지만, 바로 그 비효율의 집착이 인간적 매력을 낳는다. 뚜르비용, 미닛 리피터 같은 기술은 쓸모만 따지면 인류문명에 하등 기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시계 환자들(?)은 그것에 열광하고 지갑을 열며, 덕분에 워치메이커들은 그 비합리의 아름다움에 계속 매달린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전통, 그리고 트래디셔널]
그만큼 현대 하이엔드 시계의 경쟁은 기술 그 자체보다는 디자인, 역사,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두고 있다. 특히 역사와 스토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없기에, 창업 이후 단절 없는 270년을 이어온 바쉐론 콘스탄틴(VC: Vacheron Constantin)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압구정 메종 1755 서울에서의 270주년 전시회 입구)
앞서 언급했듯 하늘아래 완전 새로운 건 없으니, 이 긴 역사 속에 쌓인 아카이브와 족보, 과거 디자인 레퍼런스들은 오늘날 VC가 새로운 모델을 만들 때 창의적으로 조합할 수 있는 풍부한 원천이다. 즉, VC는 “보존된 전통”을 “현대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하우스이다.
VC의 드레스워치 라인업 대표 컬렉션은 Patrimony (패트리모니, 유산)와 Traditionnelle (트래디셔널, 전통)이다. 이 둘은 거의 유의어(類義語, synonym)에 가까워서 기업의 마케팅 네이밍으로는 사실 좋은 전략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글을 통해 훨씬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굳이 이 그 미묘한 어감 차이에 초점을 두어 구분을 하자면 patrimony (유산)는 실체적이고 유형적인 데 반해, tradition (전통)은 정신적, 무형적 개념에 가깝다.


(패트리모니(위)와 트래디셔널(아래))
실제로 패트리모니는 VC가 1957년 출시했던 Ref. 6179나 Ref.6187과 모델을 직접 모티프로 삼았다. 단순하지만 완벽한 비례, 얇은 베젤, 미니멀 인덱스 등 1950년대 드레스워치를 현대적으로 계승했다. 우아하고 약간은 여성적이며 둥글고 곡선 위주의 유려한 인상을 띤다.
반면에 트래디셔널은 특정 모델의 복각이 아니다. 제네바 워치메이킹에서 흔히 나타나는 아이콘들, 예컨대 도핀핸즈(dauphin hands, 칼날모양의 침) , 레일웨이 미닛트랙(다이얼 외곽을 마치 철길모양처럼 둘러싼 인덱스), 스텝드 케이스(옆면에서 바라볼 때 뚜력하게 층이 진 케이스 형태) 등을 집합적으로 모아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패트리모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단하고 또렷한 이미지이다.
즉, 패트리모니가 특정 유산을 직접 잇는 복원 내지 복각이라면, 트래디셔널은 무형의 전통적 코드를 현대 언어로 재조합 및 재창조한 결과물이다.
[계승한 전통 요소들]
구체적으로 트래디셔널이 계승한 이름 그대로의 전통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1) 도핀 핸즈
유서깊은 드레스워치의 핸즈 형태 중 하나이다. 시분침의 형태는 마치 귀족이나 기사의 검처럼 날카로운 중앙 능선을 기준으로 좌우 칼날모양의 대칭을 이룬다. 트래디셔널에게 있어 특이한 점이라면 좌우 칼날의 음영이 다른 이유가 단순히 빛의 각도 때문이 아니라 실제 마감 방식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 쪽은 유광 미러폴리싱, 다른 한 쪽은 무광 새틴 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을 통해 보면, 만약 단순히 빛의 각도 때문에 생긴 음영 차이라면 시분침의 밝은 부분이 같은 방향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 방향이다.) 이런 처리를 통해 어떤 각도에서도 또렷한 시인성을 확보한다

2) 레일웨이 미닛트랙 (Railway Minute Track)
회중시계 시절부터 널리 쓰였던 디자인 코드로서, 기차길 모양의 초분 눈금을 의미한다. 트래디셔널 또한 다이얼 외곽에 레일웨이 트랙 배치하면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3) 스몰 세컨즈
이 역시도 1800년대 회중시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디자인이다. 센터 세컨즈가 주류가 된 오늘날에도, 그 특유의 클래식한 감성 때문에 21세기에도 여전히, 특히 드레스워치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4) 스텝드 케이스 및 코인엣지
스텝드 케이스(Stepped Case)란 1930년대 아르데코 시대에 유행한 형태로서, 시계 케이스를 측면에서 바라볼 때 조약돌과 같은 매끈한 곡선이 아닌 단계적 단차를 강조하여 입체감을 준다. 특히 브레게 클래식 컬렉션의 코인엣지(Coin Edge) 스텝드 케이스가 유명하며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이 시계는 측면부 하단 일부에 톱니바퀴 모양의 코인엣지가 적용돼 있다.
5) 말테 크로스(Maltese Cross)
VC의 로고 그 자체이다. 심지어 12시·6시 인덱스에서는 바깥쪽으로 쭉 뻗은 예각 속에 비밀스럽게 숨어서 이스터애그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6) 제네바 씰 (Poinçon de Genève)
1886년 제정된 제네바 씰이 적용되어있다. 흔히 5대 명품시계라 손꼽히는 파텍 필립(PP, Patek Philippe),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AP, Audemars Piguet), 브레게(Breguet), 아 랑에 운트 죄네(ALS, A. Lange & Söhne) 중 현행 이 제네바 씰을 적용하는 브랜드는 이 VC가 유일하다. PP는 자체 품질보증 씰을 도입하였으며, AP와 브레게는 제네바가 아닌 르 브라쉬(Le Brassus)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ALS는 애초에 스위스가 아닌 독일 기업이다. VC에게 이 제네바 씰은 단순한 장식이나 품질보증서가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 워치메이킹 전통을 수호하는 맏형님으로서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현대적 재창조 요소들]
그러나 트래디셔널은 과거 요소를 그대로 복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 21세기적 재창조가 더해진다.

1) 38mm 케이스 사이즈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케이스 크기 그 자체이다. 20세기 중후반까지도 전 세계 빈티지 드레스워치의 크기는 남성용의 경우에도 31~35mm로 지금 기준으론 매우 작았다. 현행 트래디셔널이 38mm로 출시된 것은 21세기 감각에 맞는 현대적 재해석이다.


2) 비대칭 다이얼
물론 트래디셔널 컬렉션의 가장 기본모델인 수동-논데이트 시계는 6시에 스몰세컨핸즈만 있다. 그리고 확실히 대칭적 밸런스 측면에서는 그 모델이 훨씬 낫다. 하지만 이 자동-데이트 시계는 9시 방향에 스몰세컨을, 3시에 날짜창을 두어 드레스워치가 전통적으로 고수해왔던 진중함과 대칭성을 과감히 깨뜨렸다. 이는 랑에 운트 죄네(ALS)의 랑에 1과 더불어 21세기 드레스워치 디자인의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이 데이트창은 단순히 네모난 구멍을 뚫은 수준이 아니라, 중간에 한 층 더 계단형 단차를 두어 다소 밋밋할 수 있는 다이얼에 뚜렷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3) 말테 크로스 버클 디자인
단순히 로고를 새기는 수준이 아니라, 가죽스트랩의 버클 형태 자체를 말테 크로스로 만들었다. 물론 전통적으로 버클부는 다이얼의 12시 인덱스와 중앙부 사이 공간과 더블어 모든 시계브랜드들이 자신의 상징적 로고를 표시하는 부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VC는단순히 로고를 새기는 수준을 넘어, 손목 아래에서도 큼직하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당당히 새겨넣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다. 개인적으로 이 로고 자체도 좋아하지만, VC가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디자인 코드가 이 버클이라고 생각한다.
4) 톤온톤(tone-on-tone) 컬러 레일웨이
중앙 다이얼이 반무광 오팔린 실버 컬러인데 반해, 외곽의 레일웨이 미닛트랙은 이보다 한 톤 어두운 차콜-슬레이트 그레이 색으로 톤온톤 대비를 이루고 있다. 레일웨이 미닛트랙이야 100년 넘게 아주 흔하게 쓰이는 디자인이지만, 색 자체를 대비시킨 사례는 거의 본 적이 없는 독창적인 부분이다.

5) 커브드 러그 스트랩 체결 구조
가죽 스트랩이 시계와 연결되는 러그부분이 직선이 아니라 케이스 곡률에 맞게 휘어 들어가는 구조이다. 그래서 스트랩을 러그에 체결하는 스프링바 역시도 휘어져있다. (참고로 저것조차 18k 금이다) 이는 페트리모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있으며, 메탈릭한 케이스 본체와 가죽소재의 러그부 사이 공백을 최소화하여 매끈한 일체감을 주고 착용감을 향상시킨다.
[전통은 살아숨쉬어야 한다]
이처럼 트래디셔널은 수많은 전통들의 집합체이지만, 결코 단순한 복원과 보존에 머물지 않고 현대적 재구성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패트리모니나 칼라트라바와 같은 복고적 드레스워치와 달리, 드레스워치이면서도 현대적이라는 독특한 역설을 성취한다.
산업디자인 분야의 문외한으로서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트래디셔널은 분명 나에게 익숙한 여러 전통적 요소로 인해 자연스러운 시계인 동시에, 과거에도 혹은 현재 다른 회사의 어느 시계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시계이다.

단순히 옛 것을 보존하는 것은 죽은 전통이다. 반면에 아크로폴리스를 콘서트홀로, 경복궁을 패션쇼 런웨이로 활용할 때 비로소 그것은 살아 숨쉬는 유산이 된다. 이것이 바로 골동품과 유산을 가르는 기준이다. 트래디셔널이 이름 그대로 구현하는 그 전통이란 바로 장인정신과 그들이 축적해온 역사 및 디자인 언어이며, 현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구현되어 작동해야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 바쉐론 콘스탄틴은 트래디셔널을 통해 270년 역사적 전통을 잘 조합하여, 현대적 드레스워치의 새로운 표준, 즉 "미래의 고전”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평가한다. 끝.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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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원소님 글이 깊이감이 있고 너무 유려하게 잘 읽히는데 비해 맨 마지막 맺음말 '끝' 이 강려크하고 시크한 느낌을 줘서 인상적입니다. 한줄기 위트도 느껴져서 미소가 절로 나오네요. 그동안 VC 가 넘치는 아카이브 재료를 요리하는 재주가 너무 떨어지는거 아닌가...느끼고 있었는데 이 글을 보니 걍 제 배움이 부족한거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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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를 아주 사랑하시는군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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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이디엔
2025.08.26 14:18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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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이 넘치는 글 잘 읽었습니다 ~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