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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바쉐론 콘스탄틴 메종 1755에서 진행 중인 270주년 기념전을 다녀왔다. 바쉐론 콘스탄틴, 특히 패트리모니 시계의 팬으로서 이 브랜드의 과거 · 현재 · 미래에 대해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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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모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인업]

  

 

1. 홀리 트리니티 (Holy Trinity)


흔히 파텍 필립(Patek Philippe, 이하 PP),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이하 VC),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 이하 AP)는 스위스 고급 시계 브랜드의 3대장, 즉 ‘홀리 트리니티(Holy Trinity)’로 불린다. 이는 단순히 가격이나 업력 때문만이 아니라 기술적 완성도 · 디자인 · 브랜드의 상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오랜 세월 동안 전문가들이 인정해 온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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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트리니티: PP, VC, AP]

 

굳이 이들 사이에서도 위상을 매기자면 PP가 최고임에는 거의 이견이 없고, 오랜 기간 2등은 근소하게 VC의 차지였다. VC는 1755년 창립 이후 단 한 해도 문을 닫은 적 없는 가장 오래된 시계 브랜드이며, 특히 드레스워치 분야에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미감을 지닌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2. 다소 주춤한 21세기


최근 스위스 시계업계의 매출액 통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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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024 스위스 시계회사 매출액 통계(모건 스탠리)]

 

단순 매출액과 일반 대중의 인지도 기준으로 (쉽게 말해 예물 시계 추천 브랜드로)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롤렉스, 오메가, 까르띠에를 묶어 ‘롤오까’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이미 2020년부터 여성들의 시계 관심도가 높아지며 까르띠에가 오메가를 앞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전반적인 글로벌 패션 트렌드가 캐주얼해짐에 따라 드레스워치 판매 비중이 높은 론진(Longines), IWC(Internal Watch Company),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 이하 JLC), 블랑팡(Blancpain), 브레게(Breguet) 등이 하락세인 반면, 최고급 스포츠워치를 주력으로 하는 오데마 피게(AP), 리처드 밀(Richard Mille)이 상승한 것을 볼 수 있다. 


- 공교롭게도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품목들을 기준으로 산정하는 소비자물가지수(CPI: consumer price index)에서, 1965년 통계 작성이 시작된 이래 꾸준히 포함되어 있던 넥타이가 처음으로 제외된 해도 바로 2020년이다.


표면적으로 VC의 성적표는 매우 양호하다. 드레스워치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2020년 14위에서 2024년 8위까지 꾸준히 상승해왔다. 하지만 이는 홀리 트리니티의 일원으로서 팬데믹 이후 전반적인 초고가 명품 붐을 탄 결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 차트에서 나타나지 않는 브랜드 선호도, 리세일 가치, 소위 트렌디함의 측면에서는 경쟁사인 PP나 AP 대비 분명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PP나 AP의 시계들 대부분이 넘치는 수요로 인해 매장 정가보다 2차 시장 리셀가가 더 비싼 것과는 반대로, VC는 오버시즈(Overseas, 이하 OS) 컬렉션을 제외하면 리셀/중고가가 정가를 밑돈다. 희소성 측면에서 연간 생산량 기준 VC는 약 3만 점 내외로, 약 7만 점의 PP나 5만 점의 AP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을 법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 참고로 영원한 매출액 1위 기업 롤렉스는 연간 100만 점 정도를 파는데도 이토록 극심한 품귀현상을 보이니, 새삼 대단한 기업임을 실감하게 된다.

 

 

 

3. 부진의 이유


이러한 최근 VC의 부진 원인은 단기적인 마케팅보다는 중장기적인 제품 기획과 정체성 정립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1) 스포츠워치 개발의 실기(失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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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트리니티의 스포츠워치 라인업:  PP의 노틸러스, AP의 로얄오크, VC의 오버시즈]

 

앞서 언급했듯, PP는 1976년 노틸러스를, AP는 1972년 로열 오크를 출시하며 오늘날 하이엔드 스포츠워치 시장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반면 VC는 1977년 222라는 스포츠워치를 출시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 채 명맥이 끊겼고, 1996년에야 뒤늦게 오버시즈(Overseas, OS)로 재탄생시켜 본격적으로 이 시장에 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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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탄생한 222(좌). 1996년 오버시즈(우)로 재탄생하였다.]

 

사실 OS 자체의 디자인과 콘셉트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드레스워치의 명가답게 스포츠워치 속에 우아함을 가미한 매력을 높게 사는 애호가들도 (본인을 포함하여) 많다. 하지만 약 20년이라는 격차는 VC가 여전히 드레스워치 위주의 회사이며, OS는 일종의 이단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2) 라인업 체계 정비의 실패


PP는 Ref. 96을 기반으로 1932년부터 자사를 대표하는 드레스워치 칼라트라바 컬렉션을 구축하고 이를 백년 가까이 유지해왔다. 반면 VC는 1970~80년 무렵 (다른 스위스 시계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세이코가 불러온 쿼츠 혁명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중동 자본에 인수된 뒤 브랜드 전략의 혼선을 겪었다. 


명확한 브랜딩 전략 없이, 알파벳과 숫자가 결합된 레퍼런스 넘버(Reference No.) 중심의 산발적인 제품 네이밍 방식을 취한 결과, 브랜드 이미지와 제품 체계가 뚜렷하게 확립되지 못했다. 1996년 리슈몽 그룹(Richemont Group, 이하에서는 한국 법인명을 준수하여 리치몬트라 부름)에 인수된 후에야 뒤늦게 라인업 정리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오늘날 VC의 드레스워치를 대표하는 패트리모니라는 이름조차도 2004년에야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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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이후 VC 빈티지 워치 검색결과(timerediscovered.com)]

 

물론 이름이 뒤늦게 붙여졌을 뿐, 이 시계를 있게 한 VC의 전통 드레스워치의 계보는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뿌리가 되는 조상들은 일관된 라인업 체계가 없어서, 그 기간 VC의 대표 드레스워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대부분 대답하기 어려워 한다.


앞서 언급했듯 1996년 출시된 오버시즈(OS) 또한 그 뿌리는 1977년의 222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부터 222를 오버시즈로 이름 붙이거나, 혹은 1996년 부활할 때 차라리 222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으면 어땠을까? 물론 네이밍보다 더 큰 실책은 이 222가 계속 생산되지 못하고 한동안 명맥이 끊겨버린 것이다. 아마도 1970년대-1990년대 몇 차례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관된 상품전략과 철학의 구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3) 패트리모니와 트래디셔널 사이의 라인업 혼선


오늘날 VC의 드레스워치 양대 축은 패트리모니(Patrimony)와 트래디셔널(Traditionnelle)이다. 패트리모니는 1950년대 VC의 드레스워치 계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계승한다는 뜻을 담아, 유산을 의미하는 Patrimony와 현대성을 뜻하는 콩탕포랭(Contemporaine, 영어로는 Contemporary)을 조합하여 "패트리모니 컨템포러리"라는 이름으로 2004년 출시되었다. 트래디셔널은 이보다 3년 뒤인 2007년 패트리모니 내의 서브 라인업으로서  ‘패트리모니 트래디셔널(Patrimony Traditionnelle)’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하였다. 


7년이 지난 2014년,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패트리모니는 컨템포러리라는 접미어를 떼었고, 트래디셔널도 패트리모니라는 접두어를 떼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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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모니(좌)와 트래디셔널(우) 어느 쪽이 더 빈티지 시계들과 유사해 보이는가?]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 이미 지난 일이긴 하지만, 1950년대 시계부터 이 시계에 패트리모니라는 이름을 붙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 트래디셔널과 패트리모니 사이에 혼선을 주기보다는 2007년 처음부터 트래디셔널을 별개 라인업으로 출시했어야 했다.

- 굳이 별칭을 붙이고자 했다면, 각자 사전적 의미에 맞게 1950년대 빈티지 원형에 가까운 패트리모니를 ‘트래디셔널’로, 반대로 새로운 디자인 철학을 시도한 트래디셔널을 ‘컨템포러리’라고 불러야 했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두 라인업은 각기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과 명칭의 사전적 의미가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런 혼선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2004년 처음 등장한 ‘패트리모니 컨템포러리’는 ‘유산(patrimony)’보다는 ‘현대적(contemporary)’ 해석에 초점을 맞춘 모델이었다. 1950년대의 전통적 디자인 언어를 바탕에 두되, 2000년대 초 유행하던 빅페이스 워치 트렌드를 반영해 다이얼 크기를 40mm 이상으로 키운 것이다.


이후 2007년 등장한 ‘패트리모니 트래디셔널’은 동일 라인업 안에서 VC 드레스 워치의 유산은 공유하되, 오히려 과거의 보수적인 크기를 유지하는 데에 방점을 두어 ‘트래디셔널’이라는 명칭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라인업 정리 과정에서 컨템포러리가 '패트리모니'라는 이름을 가져가며 오히려 핵심 단어인 ‘컨템포러리’를 떼어버렸고, 트래디셔널은 라인업에서 완전 분리되며 ‘패트리모니’라는 개념에서 멀어졌다. 결국 오늘날 소비자 입장에서는 각 모델이 지닌 철학과 네이밍이 어긋나버려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4) 대표 모델 패트리모니 상품 기획의 혼선


패트리모니(컨템포러리) 디자인은 선조들의 유산을 꽤 잘 계승했지만, 클래식 드레스워치 치고는 너무 큰 40mm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그나마 있던 36mm (남성용) 모델을 단종시키면서까지. 정작 (이름과 달리) 디자인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한 트래디셔널이 38mm라는 적당한 사이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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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모니(좌, 40mm)와 트래디셔널(우, 38mm) 착용사진. 2mm 차이지만 패트리모니 디자인 특성상 훨씬 커보인다]

 

패트리모니는 얇은 베젤, 넓은 다이얼 비중, 울트라 씬 케이스, 그리고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인해 수치상 39~40mm라도 체감상 41mm 이상의 큰 시계로 보인다. 그리고 드레스워치 애호가들은 특히 오버사이즈 워치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최근 VC 또한 이 문제를 인식하였는지 2023년 패트리모니를 39mm로 줄여 재출시하였다. 하지만 반성의 결과라기엔 저 1mm는 너무 소극적이었다.


어쩌면 불과 몇 년 전 단종시킨 것과 똑같은 36mm로 되돌리기는 너무 고민없이 가벼워 보일 것 같고, 38mm로 줄이기엔 트래디셔널과 똑같다는 비판을 우려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 37mm 하면 됐는데...)


이처럼 VC는 브랜드 대표 드레스 라인조차 디자인 정체성과 사용자 경험 사이에서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모호함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혼선’을 낳는 이유다.

 

 

 

4. 여전히 건재한 세가지 유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VC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고전적 가치에 있어서는 지금도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 입지를 점하고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드레스워치 중에서도 1) 아름다움, 2) 우아함, 3) 고전미라는 세 측면에서 마땅한 경쟁자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바쉐론 콘스탄틴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아름다움


‘마티에 다르(Métiers d’Art)’ 컬렉션은 그 이름 그대로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물론 이 컬렉션은 VC 내에서도 극소량 생산되는 한정판 초고가 라인업으로, 브랜드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VC가 지향하는 철학과 미학의 방향성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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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에 다르(Métiers d’Art) 컬렉션: 12궁도 시리즈(상)와 전통에 대한 헌정 시리즈(하)]


다른 고급 시계 브랜드들 또한 귀금속과 복잡한 장식 기법을 통해 예술적 시계를 만들어내지만, VC만큼 일관되고 진지하게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는 브랜드는 드물다. 순수 조형미와 고전미, 장식미를 함께 담아내는 감성의 깊이에서는 VC가 단연 독보적이다.

 

 

2) 우아함


드레스워치 부문에서 거의 유일한 경쟁자인 PP의 칼라트라바가 견고함과 기능적 균형을 강조한다면, VC의 패트리모니는 곡선, 얇음, 여백을 통해 유려함과 섬세함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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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라트라바는 튼튼한 다비드 조각상을, 패트리모니는 우아한 곡선의 도자기를 닮았다.]

  

나는 지극히 주관적 기준으로 현대 드레스워치들을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 그리스 조각: 르네상스 / 견고함, 정제된 비례감 / 파텍 필립(PP), 예거 르쿨트르(JLC), 그랜드 세이코

- 곡선의 백자: 아르누보 / 유려함, 절제, 우아함 / 바쉐론 콘스탄틴(VC), 피아제, 오메가 드빌

- 귀족의 장식장: 바로크와 로코코 / 장식성, 화려함, 전통 / 브레게, 블랑팡, 프레드릭 콘스탄트

- 정밀한 기계: 바우하우스 / 기능미, 실용성, 신뢰성 / 아 랑에 운트 죄네(ALS), 글라슈테, 노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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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의 칼라트라바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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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의 패트리모니(위) 및 트래디셔널(아래) 컬렉션]

 

초고가 하이엔드 브랜드, 소위 Big 5 중에서 드레스워치 정체성이 거의 사라진 AP를 제외하면, PP, VC, 브레게, ALS가 각자의 그룹 내에서 안정된 탑 시드 플레이어다. 이 중에서도 VC는 ‘곡선의 백자형’ 미학을 대표하는 장남 격 브랜드로, 감각적이면서도 절제된 미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3) 고전미


VC는 창립 이래 수많은 왕실과 귀족들에게 선택받아온 브랜드다. 프랑스의 루이 16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는 물론, 이집트, 이란, 청나라 왕족과 심지어 대한제국의 순종까지 VC의 시계를 소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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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황제의 VC 회중시계. 백케이스에 이씨왕가를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져있다.]

 

특히 VC는 예로부터 다른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에 비해 오리엔탈 및 제3세계의 에스닉한 미감과 취향을 세심하게 반영하여 커스터마이징한 제품에 진심이었다.이는 다문화적 이해와 존중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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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에 다르(Métiers d’Art) 컬렉션: 4대문명, 레마스크, 익스플로러]

 

이러한 성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홀리 트리니티 내에서도 유독 VC만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겨냥한 테마 컬렉션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과 협업한 인류 고대문명 시리즈, 15세기 대항해 시대 탐험가들에게 헌정한 시리즈는 VC가 추구하는 고전주의적 감성을 구체화한 결과물이다. 이들이 대표 드레스워치의 이름으로 ‘유산(Patrimony)’이라는 단어를 택한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5. 여전히 밝은 전망


앞서 언급한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VC는 여전히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다른 브랜드들에 비해 꽤 유리한 상황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 마땅히 대체 가능한 경쟁자가 없다


단기적으로 홀리 트리니티 내 VC의 위상을 위협할 만한 경쟁자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하 여러 시계 브랜드 애호가들에게 욕먹겠지만...) 브레게(Breguet)는 과거에는 회중시계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떨쳤지만, 현대 손목시계 시장에서의 상품 기획, 라인업 관리, 마케팅 측면에서 그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아름다운 요소들이 산재되어 있지만, 일관된 디자인 철학으로 정제되어 있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블랑팡(Blancpain)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브랜드라는 상징성, 고급 다이버워치로서 피프티 패덤스(Fifty Fathoms)와 같은 대표 모델이 있지만 브레게와 비슷한 이유로 브랜딩에서 미숙함이 있다.

 

참고로 브레게와 블랑팡은 모두 스와치그룹 산하 브랜드다. VC와 ALS, JLC등 하이엔드-고가 브랜드를 담고있는 리치몬트 그룹과 달리, 대중 브랜드를 아우르는 스와치그룹 특성상 브레게와 블랑팡을 위한 마케팅과 브랜딩에는 한계가 분명 있을 것이다.

- 심지어 스와치그룹은 하이엔드 포지션인 블랑팡과 오메가의 대표 시계들에 스와치 로고를 붙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100만원 이하로 파는 만행(?)도 서슴치 않는다.


ALS는 마감과 완성도에서 결코 부족하지 않지만, 독일 브랜드로서 태생적인 마이너리티의 숙명을 안고 있다. 또한 연간 3만점 정도를 생산하는 VC에 비해 그 규모가 1만점 미만으로 체급 자체가 다르다. 한때 공산권 아래 통합 기업이었던 흑역사(?)도 있다. 게다가 주로 왕족과 귀족을 고객으로 해온 VC의 역사와 달리, ALS는 독일 브랜드답게 관료나 상공업자, 기술자들이 주요 고객층이었던 만큼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이미지와는 약간 미스매치가 있다.  

- 오히려 이런 배경은 현대의 자수성가 기술자인 실리콘밸리 개발자, 벤처캐피탈리스트, 대기업 CEO들에게는 VC의 금수저 귀족 스토리보다 더 어필할 잠재력이 있다.


이런 면에서 VC는 드레스워치 분야에서는 PP 외에는 딱히 경쟁자가 없다. 비교적 신생 라인업인 오버시즈(OS) 또한 아직 PP의 노틸러스나 AP의 RO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시장 내 평가가 나쁘지 않다. AP처럼 단일 모델 혹은 특정 라인에만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브랜드 전반에 걸쳐 우아함, 아름다움의 유산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고급 드레스워치, 컴플리케이션, 스포츠워치 라인업까지 아우를 수 있는 꽤나 유리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2) 리치몬트 그룹 내 보장된 위계 


VC는 리치몬트 그룹 내 최상위급 브랜드이며 그 아래에는 ALS, JLC, IWC,등이 있다. 그룹의 입장에서는 VC를 일부러 낮추고, 그 아래 브랜드를 무리하게 끌어올려 내부 경쟁(카니발라이제이션)을 유발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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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몬트 그룹 산하의 시계브랜드들]

 

물론 ALS나 JLC가 내부 경쟁을 감수하고서라도 VC를 제치고 홀리 트리니티 반열로 진입할 것이 확실하다면 반란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270년에걸쳐 정립된 위상은 결코 단기간에 바뀌기 극히 어렵다. 적어도 십수년 정도 스케일에서는 그룹 차원에서 리스크를 안고 굳이 무리한 뒤집기를 시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3) 상대적으로 쉽고 단순한 과제


세상 모든 기업이 그렇듯, 스위스 시계회사들 또한 대부분은 최소 한두가지의 고민거리는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PP와 롤렉스는 정말로 별 고민이 없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VC 앞에 주어진 과제는 상대적으로 다른 회사들보다는 해결하기 쉬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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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마 피게의 라인업]

 

예컨대 AP는 거의 모든 브랜드 에너지를 RO 하나에 몰아썼다. 그 덕택에 스포츠 워치가 대세가 된 21세기 최고 인기 브랜드로 올라섰지만, 동시에 RO 계열 외 나머지 컬렉션들이 사실상 다 말라버렸다. 심지어 일부는 로얄오크가 회사 이름인줄 아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오데마 피게라는 회사명 자체가 약간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다시 드레스워치 히트작을 내는건 지극히 어러운 일이다. (여담으로 나는 지금 튜더 역시도 블랙베이 라인업을 통해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는 중이라 생각한다.)


반면 VC의 주력인 드레스워치는 단순히 라인업과 명칭을 정리하고, 약간의 디자인을 조정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1) VC 빈티지 드레스워치를 현대적 감각으로 잘 뽑은 패트리모니를 36-38mm 사이즈로 되돌리기를 권장한다. 그리고 2) 디자인 컨셉과 철학이 살짝 다른데도 전통이란 의미의 이름이 붙은 "트래디셔널"은, 과감히 컨템포러리 혹은 다른 무언가로 이름을 바꾸어 다양한 변형과 실험을 시도한다. 현행 패트리모니나 트래디셔널이나 둘 다 비슷한 뜻이라서 좋은 네이밍 전략이 아니다. 그리고 오버시즈는 워낙 상품이 괜찮아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충분히 더 주목받을 것이다.


결국 VC의 혼선은 기술, 철학 디자인과 같은 근본적 문제가 아니라 지난 50년간의 네이밍, 그리고 기획 의도의 전달 방식의 문제였다. 다행히 이는 다른 브랜드들이 직면한 문제에 비하면 바꾸기가 쉬운 부분이다.

 

 

 

6. 도약의 기회로

 

이러한 비판은 사실 VC의 사정을 감안할 때 다소 가혹한 측면이 있다. 오늘날 제3자의 시선으로 21세기 소비자의 기준에서 그들의 마케팅과 브랜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쉽지만, 그들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VC는 상당히 잘 버텨온 회사로 평가할 여지도 충분하다.
 
특히 1980년대 쿼츠 파동 당시 VC가 직면한 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당시 스위스 시계 브랜드의 60% 이상이 파산했다. 홀리 트리니티 바로 아래 급으로 평가받던 유니버셜 제네브(Universal Genève)와,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예물시계로 인기가 높았던 에니카(Enicar)는 현재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오늘날 다시 살아난 블랑팡은 한때 회사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고, 브레게 역시 수차례의 손바뀜과 함께 사실상 영업이 중단된 적이 있다. 한편 론진은 고급 브랜드에서 중고가 브랜드로 위상이 하락했다.
 
VC 역시 다르지 않았다. 비록 역사에서 이를 강조하지는 않지만, 다른 스위스 브랜드들처럼 명맥 자체가 끊겼을 수도 있는 위기였다. 실제로 재무적 어려움 속에서 오만 자본에 인수되었고, 생존을 위해 단기적 매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관된 제품 전략과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생산된 VC 시계들은 오늘날의 위상과는 달리, 품질이나 디자인 면에서 조잡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중고시장에서도 인기가 낮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면, VC는 단순히 살아남은 수준을 넘어, 여전히 ‘홀리 트리니티’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성공적인 위기 극복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건너온 지금, 우리는 결과만 보고 그들의 시행착오를 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위기를 딛고 세계 3대 브랜드로 남은 것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DNA를 지닌 브랜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브랜딩 관련된 자잘한 문제점들은 20세기 초 양차대전, 1980년대 쿼츠파동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부분이다. 다행히도 VC 고유의 아름다움, 우아함, 고풍스러움의 가치와 철학은 잘 보존되고 있고 기술력도 특별히 쇠퇴한 징후는 없다.
 
나는 VC가 창립 270주년을 맞이하여 이 작은 위기들 극복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삼아 다시금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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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쉐론 콘스탄틴 270주년 기념전 / 2025.07.07 - 2025.07.27 / 압구정 바쉐론 콘스탄틴 메종 1755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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