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GMT_Korea

조회 1029·댓글 18
PANERAI RADIOMIR PAM00995
차이와 반복의 세계, 혹은 시계

이상우 LEE SANG WOO

Pam995_Social_01_B_Cut-1-사본.jpg
PAM00995

작은 차이로 팬덤을 만들어내다
“도대체 뭘 사야 하죠?” 파네라이를 처음 구매하는 초보 파네리스티(파네라이 애호가를 지칭함)가 흔히 던지는 질문이다. 아무리 봐도 전부 비슷한 디자인인데, 카테고리마다 수많은 모델이 있고, 이름은커녕 암호 같은 모델 넘버만 존재한다. 숫자에 일정한 법칙도 없다. 만약 숫자만 듣고 해당 모델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면 그는 분명 둘 중 하나다. 골수 파네리스티이거나 파네라이 매장 직원이거나. 이렇듯 수많은 제품이 존재하지만 무엇을 구매하든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결된다. 모델 넘버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멀리서도 한눈에 파네라이 시계임을 알아볼 것이다. 선택지는 다양하지만 무엇을 고르든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 마법. 이것이 ‘파네라이’라는 브랜드의 힘이 아닐까 싶다. 물론 ‘비슷한 결과’라는 것은 파네라이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의 시선일 뿐이다. 구입한 사람 입장에서는 분명 자신만의 파네라이를 고른 이유가 있다. 초침 유무, 다이얼 컬러, 인덱스 폰트, 케이스 재질, 스트랩에 이르기까지 누군가 선택한 파네라이 워치는 수많은 개별 요소를 조합한 유일무이한 결과물이다. 각 요소를 골라서 주문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장에는 그에 필적할 만한 다양한 제품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비슷비슷한 시계처럼 보이고, 사소한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소함’과 ‘차이’야말로 파네라이가 자신의 컬렉션을 확장해나가는 방식이자 팬덤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Pam997_Cat_Dett01_1809917--1.jpg
PAM00997

특별한 밀리터리 그린 에디션
파네라이는 과거 이탈리아 군용 다이버 워치의 역사적 원형을 기반으로 수많은 모델을 변주한다. PAM00995는 그중에서도 ‘그린’ 다이얼이라는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는 모델이다. 현재 파네라이의 컬렉션은 크게 루미노르, 섭머저블, 루미노르 두에, 라디오미르로 구분되어 있다. 기존에 라디오미르1940, 루미노르1950으로 구분되었던 컬렉션을 정리하고, 섭머저블을 독립된 컬렉션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2019년 라디오미르 컬렉션에 ‘에디찌오네 베르데 밀리타레(밀리터리 그린 에디션)’를 새롭게 추가했다. PAM00995, PAM00997, PAM00998, PAM00999가 함께 출시되었는데, 4개 모델의 공통분모는 라디오미르1940 케이스를 기반으로 그린 컬러 다이얼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그린’은 파네라이에서 특별한 컬러다. 파네라이는 2011년 섭머저블 브론조 PAM00382를 발표하면서 브론즈 워치 트렌드를 일찌감치 선도했다. 당시 PAM00382에 사용한 다이얼이 그린 컬러였는데, 이는 브론즈 재질의 케이스와 멋지게 어우러지면서 파네리스티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후 그린 다이얼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으나, 최근 시계업계에서 그린 컬러가 유행하면서 파네라이 역시 숨겨뒀던 초록색 카드를 조금씩 꺼내 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모델이 PAM00911이다. 파네라이 전 CEO 안젤로 보나티의 퇴임 기념으로 발매한 한정판으로 루미노르 케이스에 그린 다이얼과 골드 핸즈를 조합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모델은 현재 매장에서 구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리세일 시장에서도 꽤 높은 프리미엄이 붙은 상태다. 따라서 만약 현재 파네라이의 그린 다이얼 모델을 구입해야 한다면 PAM00995는 가장 좋은 선택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Pam998_Cat_Dett01_1809936-1.jpg
PAM00998

그린 다이얼과 골드 핸즈, 그리고 돔 글라스의 조화
PAM00995는 4개의 밀리터리 그린 에디션 중 가장 기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45mm 쿠션형 라디오미르1940 케이스에 시침, 분침, 초침만 담았다. 만약 데이트 기능이나 GMT 기능이 필요하다면 PAM00998이나 PAM00999를 구입하면 된다. 가격 차이가 크지 않는데다 파워 리저브 기능까지 추가되었으니 오히려 ‘가성비’ 측면에서는 뛰어나다. 다만 파네라이의 헤리티지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날짜 창 없이 숫자 3, 6, 9, 12가 모두 담긴 심플한 PAM00995에 더 마음이 갈지 모른다. PAM00997은 그린 다이얼이긴 하지만 48mm 블랙 세라믹 케이스에 블랙 핸즈를 적용해 다른 3개 모델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다이얼은 채도 낮은 진한 무광 그린이다. 최근 출시한 타 브랜드의 그린 컬러 모델들이 대부분 화려한 선레이 다이얼을 적용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유니크한 부분이다. 파네라이의 원형이 군용 시계라는 것을 떠올리면 밀리터리 그린은 시계의 정체성을 보다 뚜렷하게 만드는 컬러라고 하겠다. 무광 그린 다이얼과 대비되도록 케이스 전체를 유광 폴리싱으로 처리했다. 파네라이 특유의 샌드위치 다이얼에 인덱스는 빛바랜 야광 물질을 재현한 베이지 컬러로 처리했으며, 골드 핸즈를 적용해 포인트를 주었다. 여러모로 밀리터리 그린 컬러와 잘 어울리는 빈티지 조합이다.

일반적인 라디오미르 모델과 달리 돔 글라스를 적용했다는 것도 매력 포인트다. 47~48mm 모델에는 종종 돔 글라스가 사용되지만, 사실 루미노르 44mm 모델이나 라디오미르 45mm 모델에는 돔 글라스가 흔치 않다. 소위 ‘갓삼삼’이라고 불리는 PAM00233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모델 자리를 지키는 것도 루미노르 44mm 케이스에 돔 글라스를 적용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PAM00995는 PAM00233과 동일한 돔 글라스를 적용해 특유의 빈티지 느낌을 배가한다. 볼록 튀어나온 돔 글라스는 베젤 라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시계 전체가 한 덩어리의 물방울처럼 보이게 만든다. 글라스 바깥쪽에는 굴절로 숫자 형상의 왜곡이 발생하는데, 이 또한 돔 글라스만의 특징이다. 한번 경험해보면 다른 평범한 글라스가 심심해 보일지 모른다.

무브먼트는 P.4000 인하우스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장착했다. 라디오미르는 루미노르와 달리 스크루다운 방식의 크라운을 쓰기 때문에 오토매틱 방식이 아무래도 더 편리할 것이다. 최근 루미노르 두에 컬렉션이 등장하기 전까지 파네라이에서 라디오미르1940 컬렉션은 드레스 워치의 포지션을 맡았다. 다른 파네라이 모델보다 얇게 만들기 위해 파네라이는 2014년 마이크로 로터를 적용한 인하우스 오토매틱 무브먼트 P.4000을 발표했는데, PAM00995에도 이 무브먼트를 장착했다. 72시간 파워 리저브에 텅스텐으로 만든 마이크로 로터의 효율성을 더해 어지간해서는 멈추는 일이 없다. 참고로 데이트, GMT, 파워 리저브 기능을 추가한 PAM00998에는 P.4001을, PAM00999에는 P.4002를 탑재했으며, PAM00997에는 P.3000 수동 무브먼트를 탑재했다.


Pam999_Social_01_B-사본-2.jpg
PAM00999

시계 자체에 주목하면 비로소 다양성이 보인다
모든 차이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 드러난다. 루미노르 케이스의 그린 다이얼 PAM00911과 라디오미르 케이스의 PAM00572, 그리고 돔 글라스의 PAM00233이 있기 때문에 PAM00995가 존재할 수 있으며, PAM00995는 언급한 세 모델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면서 각각의 모델을 대체한다. 그리고 PAM00995가 만들어낸 차이는 또 다른 파네라이 모델의 생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네라이 시계가 가장 잘 어울리는 철학자를 꼽는다면 아마도 질 들뢰즈가 아닐까 싶다. 들뢰즈 철학의 핵심 키워드이자 메인 저서의 타이틀은 ‘차이와 반복’이다. 우리가 시계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파네라이의 컬렉션을 살펴보면 모두 동일한 제품일 뿐이다. 하지만 수많은 파네라이 시계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시계의 ‘개념’이 아니라 각각의 ‘시계 자체’에 주목할 때 비로소 다양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파네라이는 한없이 매력적인 시계가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값비싼 패션 시계가 된다. 차이를 인식하는 힘은 존재 자체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각 개체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간극을 메우려는 욕망이 전 세계 수많은 파네리스티를 양산하는 게 아닐까? 만약 당신이 이 세계의 사소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면, 시계 자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파네라이는 어떤 브랜드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흥분과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