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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GER-LECOULTRE POLARIS MARINER DATE 
슈트에 잘 어울리는 다이버 워치

이상우 LEE SANG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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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메모복스 폴라리스

폴라리스에서 폴라리스 마리너로
예거 르쿨트르의 중심은 리베르소와 마스터 컬렉션이다. 각각 메종의 사각형과 원형 드레스 워치를 대표한다. 특히 리베르소의 역사성과 상징성이 강하다 보니 예거를 드레스 워치만 제작하는 브랜드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예거는 1950년대부터 알람 다이버 워치를 제작할 만큼 스포츠 워치에도 강한 면모를 보였다. 다만 드레스 워치의 화려함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예거의 다이버 워치는 독특한 알람 기능과 함께 주류 다이버 워치에서 살짝 벗어난 컬트적 디자인이 특징이다. 밸브 형태의 크라운 잠금장치를 갖춘 마스터 컴프레서, 최초의 알람 다이버 워치를 복각한 ‘메모복스 트리뷰트 투 딥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멋진 유산이 있음에도 그동안 예거는 다이버 워치나 스포츠 워치에 크게 주력하지 않았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전 세계적인 럭셔리 스포츠 워치 열풍 속에서 예거는 2018년 폴라리스 컬렉션으로 이 시장의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폴라리스는 예거의 빈티지 다이버 워치 메모복스 폴라리스에서 영감받은 것으로, 현재 예거의 스포츠 워치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 출시 당시 논데이트, 데이트, 크로노그래프, 월드타이머 등 여러 모델을 공개했는데, 그중에서도 1000피스 한정으로 선보인 폴라리스 메모복스는 1968년 출시된 알람 기능 다이버 워치를 재현해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폴라리스 컬렉션은 스포츠 워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다이버 워치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폴라리스 마리너는 이런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는 신제품으로, ISO 6425를 준수하는 진정한 다이버 워치다.

예거 빈티지 다이버 워치의 계보를 잇다
폴라리스 마리너의 역사는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거는 1959년 물속에서 수면으로 올라갈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세계 최초의 알람 다이버 워치 메모복스 딥씨 알람을 출시했다. 이어서 1965년에는 방수 성능을 높이고 수중에서 소리가 더 효과적으로 확산되도록 트리플 케이스 백을 적용한 메모복스 폴라리스를 선보였다. ‘폴라리스’라는 이름은 당시 미국의 잠수함 발사용 탄도 미사일 UGM-27 폴라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민간 판매용 제품이지만 군용 다이버 워치의 강인함과 신뢰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이 메모복스 폴라리스는 시계 애호가는 물론, 전문 다이버에게 큰 인기를 모았고, 3년 뒤인 1968년 예거는 리뉴얼을 단행했다. 다이얼 중앙에 위치한 알람 세팅 다이얼, 이너 베젤, 기능 조작을 위한 3개의 크라운, 볼드한 아라비아숫자 및 사다리꼴 인덱스 등 현재 폴라리스 마리너의 디자인 요소가 대부분 이때 완성되었다. 즉 폴라리스 마리너는 1968년 메모복스 폴라리스의 현대적 재현이자 예거 다이버 워치의 역사적 계보를 잇는 상징적 모델이다. 예거는 오리지널 메모복스 폴라리스의 알람 기능까지 충실하게 구현한 ‘폴라리스 마리너 메모복스’, 그리고 알람 기능을 제거해 실용성을 높인 ‘폴라리스 마리너 데이트’ 모델을 함께 선보였다. 두 시계는 알람 기능의 차이만 있을 뿐 동일한 디자인을 공유한다. 외형상으로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다이얼 중앙의 알람 표시 마커와 크라운의 개수 정도다. 여건이 된다면 알람 다이버 워치의 헤리티지를 간직한 메모복스 모델이 좋은 선택이다. 기계식 알람 기능을 갖춘 다이버 워치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 하지만 알람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890만 원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예거의 엔트리 드레스 워치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알람 기능에 욕심이 없다면 디자인이 동일한 데이트 모델을 구입하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다. 이번 리뷰에서도 데이트 모델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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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폴라리스 마리너 메모복스

2개의 크라운, 1개의 잠금장치
외관이나 기능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이너 베젤과 이를 조정하기 위한 별도의 크라운이다. 일반적인 다이버 워치가 회전 베젤을 외부에 장착하는 데 비해, 폴라리스 마리너는 시계 내부에 회전 베젤을 장착했다. 이는 1960년대 빈티지 다이버 워치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인데, 1968년 메모복스 폴라리스의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데이트 모델의 경우, 이너 베젤 조정은 스크루 다운 방식을 적용한 2시 방향의 크라운이 맡는다. 잠금장치를 풀면 크라운이 튀어나오면서 오렌지색 안전 밴드(security band)가 나타난다. 이는 크라운을 잠그지 않고 입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 장치다. 이너 베젤 방식임에도 역방향으로만 회전하도록 했고, 제법 단단한 클릭감도 느껴진다. 2개의 크라운이 마치 크로노그래프 시계처럼 보여 스포티한 느낌을 주는 것도 눈에 띈다. 다만 전문 다이버 워치를 표방했음에도 4시 방향 크라운에 스크루 다운 방식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의외다. ISO 6425 인증까지 받았으니 기능적으로 문제는 없겠지만 강도 높은 수중 활동에서는 심리적으로 신경이 쓰일 것 같다. 와인딩은 꽤 부드러운 편이다. 1단에서 날짜를 조정하는데, ‘찰칵’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숫자가 ‘점핑’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데이트 모델에는 예거의 인하우스 무브먼트 칼리버 899AB를 탑재한다. 칼리버 899 시리즈의 최신 버전으로, 기존 폴라리스 데이트 모델에 장착한 899A/1의 38시간 파워 리저브를 70시간까지 늘렸다. 300m 방수 다이버 워치임에도 시스루 백으로 무브먼트를 노출한 것 또한 장점이다. 기본 기능만 갖춘 엔트리급 엔진이지만 예거의 정교한 무브먼트 피니싱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브레이슬릿의 클래스프는 예거 로고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열리는 방식인데, 푸시 버튼을 양방향으로 적용한 점이 독특하다. 다이빙 슈트를 위한 익스텐션 기능은 제외했다. 폴라리스 마리너를 위해 설계한 것이 아니라 기존 폴라리스 모델과 공유하는 브레이슬릿이기 때문이다. 다만 간단한 미세 조정이 가능해 하루 중 손목의 변화에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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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폴라리스 마리너 데이트

심해의 적막을 담아낸 래커 다이얼
이 시계의 가장 특별한 가치는 다이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한 감청색 래커 다이얼에 그러데이션 효과를 더해 전문 다이버들만 도달할 수 있는 심해를 아름답게 구현했다. 여기에 밝고 선명한 화이트 컬러의 숫자 인덱스와 아워 마커가 대비를 이루면서 시인성을 높인다. 다이얼은 사진과 실물의 차이가 큰 편이다. 래커 다이얼 특유의 광택과 질감이 그래픽 이미지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탓이다. 눈앞에 실재하는 다이얼의 색감과 깊이감이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면 실물 영접은 조금 뒤로 미룰 것을 권한다. 아마도 매장을 그냥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래커 마감으로 처리했지만 가공 방법은 다이얼 영역별로 다르다. 중앙의 작은 원형 다이얼은 그러데이션 효과를 주면서 선레이 브러시 기법으로 처리했다. 색이 어둡고 미세하게 가공해 실내 조명으로는 선레이 가공을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검푸른 심해 속으로 수면의 빛이 살짝 새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미닛 트랙 너머 외곽 다이얼에는 그레인 마감으로 거친 질감을 표현했는데, 여기에도 그러데이션 기법을 적용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바깥쪽 이너 베젤은 오팔린 마감으로 처리했다. 이렇게 3단계의 검푸른 래커 다이얼로 시계에 무게감을 준 다음, 오렌지 컬러를 곳곳에 배치해 캐주얼한 감각을 더했다. 초침 끝을 비롯해 이너 베젤의 역삼각형 마커와 5분 단위 인덱스, 크라운의 안전 밴드 등 주로 잠수 시간 측정과 관련된 부분에 오렌지색을 입혔다. 이는 수중에서 시인성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다이버 워치 특유의 경쾌함을 더한다. 흔히 다이버 워치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다의 역동성이다. 하지만 폴라리스 마리너에서는 심해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전문 다이버 워치를 표방하지만 기존 폴라리스보다 드레스 워치에 훨씬 가까워졌다. 드레스 워치의 강자 예거 르쿨트르의 다이버 워치란 이런 것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이 시계는 스포츠와 드레스, 과거와 현재 사이를 유영한다. 그리고 사용자가 용도를 선택하는 순간, 곧바로 그에 맞게 분위기를 바꾼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색하지 않다. ‘다이버 슈트’는 물론 ‘슈트’에도 잘 어울리는 다이버 워치라니. 역시 장르가 바뀌어도 혈통은 감출 수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