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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os 383 2007.03.19 23:29
 
링고님의 간만(?)의 역작이 메인화면에서 너무 빨리 사라져서........ 그냥  생각나는대로 써봤습니다. ㅎㅎ
 
 
..........
 
어릴적 꽤나 이런 저런 학원에 많이 끌려다녔던 것 같습니다. 태권도 도장, 산수 학원,
글짓기 학원,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 웅변학원…… 이런것들을 왜 배워야 하는지
필요를 느끼기 전부터 강요당한 어린시절의 조각들이었고 나중에 가선 왜 열심히 하지
않았나하며 반찬값을 아끼고 나에게 이런 기회들을 주었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건 이미 어느정도 철이 든 이후였지요.
이런 학원들 중에 오늘 갑자기 기억이 난건 주산학원이었습니다.
취학후 몇해 지나지 않아, 그 시절 카시오 계산기 시계를 차고가서 산수 시간에
사용하다가 걸린 후 제가 끌려 간 곳이었죠. 시대가 어느때인데 하면서도 학원에
억지로 다녔고 주판을 뒤로 뒤집어서 책상위에서 학원 복도에서 굴리면서
누구 주판이 더 멀리 나가나 하는 놀이를 주로 했었습니다. 그 놀이를 못하는
수업시간에는 주판알들을 손바닥에 비비곤 했는데 그 느낌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계산기라는 좋은 물건이 있는데도 주판을 튕긴다는데 심한 염증을 느낀 어린이였던
저는 곧 슬슬 학원을 땡땡이 치기 시작했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얼마나
어머니께 맞았는지)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기원후 1세기에서부터 휴대용 주판이 로마인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주판. 지금은 쓰지 않더라도 아기자기하게 깎인 향나무들이 담겨져있던 옛날의
주판이 그립기도 합니다.
 
 
기계식 시계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난데없이 주판이 떠올랐습니다.
전자 제품에 밀려 시간과 시대의 뒷편으로 흘러간 물건이 한둘이겠느냐만은
한사람이 이야기 하기에는 어쩌면 하나의 물건도 사실 벅차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제가 주위를 둘러보면 그래도 주판보다는 시계가 호강합니다.
기계식 시계를 찬 남자는 가끔 볼 수 있어도 주판을 튕기는 사람은
보기 힘들 뿐더러 보습학원이 가득한 건물들 사이에서도 주산학원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왜 내가 기계식 시계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시절 아주
처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을때는 찜찜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었었습니다.
시대착오.
 
 
저는 옛날이 좋았지 라고 생각할 나이도 아닐뿐더러 옛날이란 단어에 별로
큰 감상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역사는 가끔 한걸음 후퇴할는지 몰라도
결국에는 두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고 믿고,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형성될 시간도 없이 0과 1사이를 반복하는 것들에 대해 익숙하고, 아니
오히려 어릴 때 컴퓨터를 켜면 숫자 1에서 128까지 챠르르 올라가던
큼직한 도트가 만든 숫자의 모습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기계식 시계에 대한 기억 중 가장 풍경이 있는 모습을 굳이 떠올리자면
할머니집의 여름엔 너무 시원했던 마루 위에 서있던 벽시계에
큼지막한 열쇠를 꽃아 밥을 주셨던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그 아래 있는
시계부랄이 혼자서 왔다갔다 하는게 신기해서 까치발을 들어
자꾸 그걸 쳐대던 어린 저입니다. (뭐 그 집은 할아버지의 잘못된 보증으로
인해 그 시계와 함께 송두리째 날라가고 야반도주의 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자, 세번정도 외치고 다음 줄을 읽어주세요. 보증금지.)
 
 
 
 
그게 기계였는지도 몰랐고 그런 기계가 손목위에 올라올줄도 몰랐고
지금 손목위에 올려져 있는 기계는 그런 어릴때의 풍경에 대한 기억과도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더더욱, 어릴적의 향수와의 연결고리도 그리 없고,
스스로 시대착오적이라고 느끼면서도 저 같은 게으른 사람이 지금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유야말로 흐르는 시간을 작은 문자판 안에
담으면서 시간을 이겨내고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기계식 시계 그 자체의
매력의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쿼츠 혁명이라는 그 단절의 시점과는 인종부터 다른 지금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 이해를 구해야 하는것도 양해를 얻어야 하는것도 많은
기계식 시계라도 지금 이렇게 다시 살아났고 그 가격을 떠나
아무리 저렴한 가격이라도 손목위의 작은 사치를 누리게해주고
턱뼈가 빠질만큼 높은 가격으로도 더 좋은 무언가에 대한 갈증을
유발시킵니다. 아무리 우리가 달라졌어도 우리 안에 설명하기 힘든
본질이 있다는걸 일깨워 주는것일 수도 있는…… 그런 세상에 많은
좋은 물건중에 하나입니다.
 
현행품이 있는한 제가 그리 시대착오적인건 아닌거 같습니다.
 
다만 마이너리티일 뿐이죠.
 
 
단절의 시대가 시작되기 바로 전의, 역사의 연속성을 순수히 그대로
담고있는 빈티지 시계들도 매력적일지라도…… 지금은 지금의 시계들을
바라보는것도 벅차다고 느껴집니다. 단순히 빈티지가 어려워서 뿐만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부활’의 역사를 함께한다는 의미가 현행품 기계식
시계들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정신도, 정성도, 미학도
아쉬울 수 있지만, 그냥 한때의 죽은 자식 부랄만지기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우리 개개인이라는 객체에 있어선 과거보다도 미래보다도
더 중요한 지금을 함께하는, 어쩌면 옛날 사람들보다 나은 점 만큼이나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는 우리들의 지금의 모습을 반영하는것일 뿐일지
모릅니다.
 
좋은 옛날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저도 그런 시계들에 대한
욕심이 납니다. 하지만 소유하고픔을 이겨내고 그런 존재의 이야기의
자체를 더 즐길수 있는 이유는 제가 소유한다는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국민학교 시절 동네에서 예쁘기로 당시 소문난
옆집 새댁 아주머니에게 연정을 느꼈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그
아주머니를 찾으려고 하는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입니다. 구하기
어렵고 많은 값을 치뤄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보다는… 저와 다른
시간대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갈구한다는건 시간의 힘을 거스르려 하는것만 같은
같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이야기로 즐기고,
현재에 사는 우리들을 위해 현재에 나오는 시계들을 손목위에서 즐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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