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Hot 게시글은 조회수1000 or 추천수10 or 댓글25 이상 게시물을 최근순으로 최대4개까지 출력됩니다. (타 게시판 동일)<원문 : Timescene Vol.4>
일찍이 그들의 존재에 주목한 나는 98년에 두 번 르 로클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그들의 아뜨리에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올 해(*2005년에 쓰여진 글입니다)에는 이전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취재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자 파피에서는 03년에 새로운 사옥이 지어졌을 때 많은 미디어가 방문했는데 당신은 아직인가 라고 한 것으로 취재는 시작되었다.
이번에 르노 에 파피로 향하는 목적은 하나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일본인 시계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스위스와 독일의 고급 시계 공방의 취재기사가 지면을 달구고, 스위스의 WOSTEP에서 배우고 있는 일본인이 많아진 요즘. 이제 슬슬 야심에 가득 찬 시계사가 본 고장에서 활약을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던 찰라 그러한 시계사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물론 일본의 시계 학교에서 배우거나, 수입대리점과 일본 법인에서 일하고 있는 시계사들에게도 이러한 모델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미스터. 하마구치와 취재를 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엄중한 경비가 늘 이뤄지고 있는 회사. 인터폰 너머로 방문 상대를 부를 때는 왜인지 늘 긴장된다.
‘안녕하세요?’
이 긴장감을 단숨에 녹여버릴 것 같은 온화한 표정의 청년이 마중나왔다. 이름은 하마구치 타카히로. 1977년 6월 생이기 때문에 올해 27세. (* 일본은 만으로 나이를 셉니다. 또 생일도 지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나이를 세는 것과 1~2년 가량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가 시계 세계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어떤 시계 잡지의 기사(94년)가 계기였다. 그 기사는 스위스 뉴 샤텔에 있는 WOSTEP의 레포트와 그 옆에는 쥬 계곡의 시계 학교 학생 모집 포스터가 게재되어 있었다. 당시는 히코 미즈노 쥬얼리 칼리지의 시계 코스도 없었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제 2 정공사 OB로 뉴 샤텔 천문대 크로노미터 콩쿨에서 대 활약을 했을 때의 조정 담당자 노무라씨의 자택에서 개강한 ‘노무라 시계 공방’의 기사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시계 기술자 양상의 기관이 거의 없었던 시대였다.
이 기사를 접하게 된 것은 하마구치씨가 고등학교 1학년일때의 때. 실천으로 배운 지식과 기술을 그 대로 살려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의 마음을 불과 2페이지의 기사가 사로잡은 것이다.
행동력의 유무는 개인에게 달려있고, 처음의 충동을 그대로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고교 졸업 후 바로 그는 단신으로 스위스로 향했다.
먼저 뉴 샤텔의 프랑스 어학교를 2년간 다녀 어학을 마스터 했다. 그 후 그의 마음을 뒤흔든 쥬 계곡의 시계 학교를 3년 동안 다니고 마지막으로 르 록클의 시계 학교에서 복원 과정을 2년간 다녔다. 그러나 복원이 성에 차지 않은 하마구치씨는 설계, 개발 부분의 문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작성한 취직희망원을 받은 르노 에 파피가 관심을 보이고, 3개월의 연수를 거친 후 2004년 1월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소속은 연구 개발실이 되었다.
메이커에 있어서 불 필요한 섹션은 하나도 없지만, 특수, 복잡시계를 개발을 주로 하는 AP 르노 에 파피와 같은 개발 팀에 있어서는 설계 부문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테크니컬 디렉터인 지우리오 파피씨도 이 부서에서 진두 지휘하고 있다.
‘우선 2차원의 CAD로 설계를 합니다. 그로부터 플라스틱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작동을 확인합니다. 그 다음 3차원의 CAD로 다시 설계를 하고, 또 프로토타입을 제작합니다. 설계와 프로토타입 만들기 양쪽을 겸하고 있는 것은 르노 에 파피 뿐일 겁니다.’
현재 지우리오 파피의 서포트 하고 있는 하마구치씨. 모니터를 향한 그의 표정에서 충실감이 묻어 나온다.
‘운이 좋았죠. 쥬 계곡의 시계 학교 관계자와 파피씨도. 멋진 사람들과 만남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마구치씨와 같이 스위스에서 직업을 갖고자 하는 젊은이에 대한 조언 부탁 하자,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스위스에서 일본인이 노동 비자를 취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와이프가 스위스인이기 때문에 이 정도가 가능했지만요’
이 말에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스위스 전 인구에 있어서 외국인의 비율은 무려 20%를 넘는다. 그러나 그 중 약 40%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의 5개 국에서 이주이다. 더욱이 스위스는 EU 비 가맹국이면서도 노동자격 허가의 취득이 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EU 및 EFTA 가맹국 출신자로 한정된다.
요약을 하면 일본인이 스위스에서 노동 비자를 취득하는 것은 자력으로는 매우 어렵고, 배우자와 노동을 하는 기업의 책임자등 후견인의 존재가 어느 정도 필요하게 된다.
어학의 벽과 생활 습관의 차이등 넘어야 할 문제가 산더미만큼 많은데다가, 그 전에는 노동 비자를 발급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마구치씨는 스위스에서 일하는 자유와 즐거움,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은 일상 생활을 크게 만끽하고 있지만 앞서 말한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고서 시계의 본고장 스위스에서 와 도전을 해 보겠다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운이 좋았죠’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한 발언에서 표현 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