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찾기 Highend
여러분은 시계를 선택할 때 어떤 요소를 중요하게 보시나요?
저는 제 닉네임 택에도 적어뒀지만, Beauty(아름다움), Practicality(실용성), 그리고 Identity를 중시하는데요.
아이덴티티 중에서도 최근 들어 급격하게 떠오르는 느낌의 핫한 느낌 말고,
(다소 식상하더라도) 예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는 어떤 것.. 이런 쪽을 더 선호합니다.
제 PP 5054 포스팅들을 볼 때마다 종종 접하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파텍에 저런 시계가 있는줄 처음 알았다'는
것인데요 ㅋ 단종된지 10년 이상이 훌쩍 지난 시계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포스팅에선 PP 5054가 파텍의 어떤 조상 시계들이 갖고 있던 요소를 물려받았고,
그 요소들이 현행 시계에는 또 어떤 식으로 녹아들어가 명맥을 유지해주고 있는지 썰을 풀어보려 합니다 ㅎㅎ
1. 무브먼트 cal. 240
먼저 무브먼트에 관해서는 이 사진 한장으로 요약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자료의 출처는 https://www.deployant.com/press-release-40-years-of-the-patek-philippe-caliber-240/ 여기인데요.
페니님께서 2017년에 아주 읽기 쉽게 아래 링크와 같이 번역을 해주기도 하셨죠.
https://www.timeforum.co.kr/15737658 (파텍필립 cal. 240에 대하여)
윗 글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cal. 240과 관련해서 제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이 무브먼트가 개발된 시기인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1977년은 쿼츠파동이 현실화 되었을 무렵이란 것입니다.
기계식 시계 시장 자체에 검은 그림자가 잔뜩 드리웠던 시기였던데다가, 파텍으로서도 대체제라 할 수 있는
JLC cal. 920을 실제 사용하고 있기도 했었구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cal. 240이라는 명기를 탄생시킨 PP..
저 사진 속의 작은 일부에나마 제 5054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PP의 cal. 240이나 JLC의 cal. 920 등 하이엔드 울트라씬 무브먼트에 대해서는 제 이전 포스팅인
https://www.timeforum.co.kr/16622051 (하이엔드 울트라씬 오토매틱 무브먼트 트로이카 - FP 71, JLC 920, PP 240) 에도
자세히 적어두었으니 참고해 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2. 컴플리케이션
10~11시 방향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7~8시 방향 문페이즈와 데이트, 4~5시 방향 스몰세컨이 위치한 비대칭 형태의 컴플리케이션.
아마도 이 설명만으로도 요즘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5712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텐데요.
3712와 5712.. 이게 다 얼마야 ㄷㄷ
5712가 저 컴플리케이션을 담은 가장 나중의 시계라고 하면,
반대로 이 형태의 컴플리케이션이 (제가 아는 한)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은 ref. 5015를 통해서 입니다.
1990년대에 출시된 이 시계는 뒤에서 소개할 officer's case까지 포함해서, 5054의 정확한 직계존속 뻘 되는 모델인데요.
사실 문페이즈 부근을 보시면 데이트 창이 생략되어 있는 등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나중에 5712까지 이어지는 저 비대칭 중급 컴플리케이션의
모태가 되는 시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5015 다음에 2000년경 2세대 주자들로서 출시된 것이 바로 5054와 친구들(?)이죠 ㅋ
(위에서부터 5054, 5055, 5057, 5085)
개인적으로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컴플리케이션인데,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 상당히 아쉽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디자인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5712 같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히트작도 존재하는데 말이죠.
이런 다른 브랜드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컴플리케이션은 그 자체로 해당 브랜드임을 어필하는
아이코닉한 요소가 되기도 하는데요. 이에 대해선 제 이전 포스팅인 '시그니처 컴플리케이션 ( https://www.timeforum.co.kr/16569395 )'에
자세히 적어뒀으니 참고를 ^^
3. Officer's case
마지막으로는 케이스입니다.
5054를 보신 분들은 아마도 '헌터백'이라 불리는 케이스백 형태에 가장 주목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다른 브랜드는 말할 것도 없고 PP에서도 그리 흔히 보이는 케이스 형태는 아니긴 하지만,
Patek Philippe Officer's Watch 라는 검색어가 시계 위키백과 같은데에 항목으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 officer's case는 PP에서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놓은 케이스입니다.
여기서 officer는 보통 '장교'로 번역되는 것 같은데요.
세계대전 때 장교들이 회중시계에 러그 내지 스트랩을 달아 사용하기 시작한 데에서 유래한 디자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특징적인 요소로는 돌출형 스크류와 비교적 굵은 스트랩 바가 있는 스크롤 러그, 양파용두, 헌터백, 둥근 케이스 등을 들 수 있구요.
비교적 현대의 모델 중에서 officer's case를 장착한 시계로는 150주년 기념모델인 3960 이 있습니다.
그 후 3960과 거의 비슷하지만 더스트커버 속을 시스루로 하고 데이트창을 추가한 형태의 5053이 등장하구요.
비슷한 무렵 5053의 컴플리케이션 모델 격으로 5054가 출시되게 됩니다.
현재는 파텍 공홈에선 삭제된 것으로 확인되지만 리테일러들에는 아직 가끔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아래 5153도 officer's case를 잘 계승하고 있는 모델이죠.
위의 시계들이 심플한 형태의 officer's case 시계들이고, 5054가 중급 컴플리케이션이라고 하면,
아래와 같은 퍼페츄얼캘린더 혹은 그 이상의 시계들에도 officer's case는 적극적으로 적용되어 왔습니다.
(위에서부터 5059, 5159, 5213)
일단 시스루백 자체가 실용성 면에선 사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고,
거기에 여닫는 뚜껑을 하나 더 달아놓는다고 한들 없던 쓸모가 생길 리는 만무하겠습니다만 ㅎㅎ;
그래도 가슴 깊은 곳 어딘가의 감성을 마구 자극당하는 느낌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고풍스러운 느낌의 드레스워치를 좋아하는 제게는 더더욱 말이죠.
...
이상이 제가 찾아본 pp 5054의 계보입니다.
서브마리너, 로얄오크, 리베르소 등이 지닌 훨씬 더 강력한 아이코닉함이라든가,
브레게 3130과 같은 수십년에 걸쳐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항상성..을 갖고 있진 못하지만
한 브랜드 내에서 내 시계에 앞서 어떤 모델들이 먼저 나와서 영향을 미쳤고,
또 그 후 현행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영향들을 주었는가를 발굴해 내는 과정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네요.
기계식 시계의 역사가 아주 길지는 않다고 하지만, 잘 살펴보면
완전히 새롭게 갑툭튀한 시계는 오히려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 시계가 어디서 유래했고 또 어떤 모습으로 새롭게 바뀌어 가는지
그 자취를 찾아 나서보는 것도 시계생활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요^^
앞서 소개한 요소요소가 잘 묻어난 최근의 5054 사진들 몇장을 마지막으로 포스팅 마칩니다.
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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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ioKim
2019.07.1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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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2 18:01
재밌게 읽으셨다니 좋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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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계초보
2019.07.11 21:35
내공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cal240은 현존 최고이자 제 드림워치의 무브입니다.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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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2 18:03
cal. 240을 좋아하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초보라는 닉네임은 어울리지 않으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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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1234
2019.07.11 22:18
재밌게 잘 봤습니다.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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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2 18:0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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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
2019.07.12 09:27
긴글인데 순삭이네요 빠져들어서 잘읽었습니다 굉천님의 5054는 두께가 얼마나 되나요? 5712가 미드컴플리케이션인데도 불구하고 얇다고 들어서 5054는 드레스라인이라 더얇은것인지 궁금해지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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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2 18:04
공식 수치는 발견하지 못했고, 대락 재어본 바로는 9mm 초중반쯤 되는것 같습니다. 헌터백 포함해서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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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감생신
2019.07.12 10:08
파텍 드레스워치의 족보 새롭게 눈이뜨이네요, 훌륭한 글 잘봤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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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2 18:05
족보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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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er
2019.07.12 10:22
좋은글 추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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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2 18:05
추천 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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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IV
2019.07.12 11:31
좋은 정보글 감사합니다.
굉천님 취향은 저랑 비슷하면서도 또 어느 부분에서는 다른..
저 자신의 취향과 비교 하며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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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2 18:06
드레스워치야말로 취향의 다양성이 가장 잘 묻어나는 영역이 아닌가 싶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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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isserie
2019.07.13 15:48
좋은글 너무 잘봤습니다. 잡지읽는 기분으로 정독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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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3 17:17
부족한 짜깁기성 글인데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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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캉
2019.07.13 22:31
역시 굉천님 최고최고 입니다 읽다보니 빠져들어 꾀오랜시간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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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3 22:50
감사합니다! 섹시한 위블로 금통 최근에 자주 보여주시고 타포에 모습도 자주 보여주셔서 좋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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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젯
2019.07.13 23:59
역시 좋은 글입니다.
해박한 지식에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계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셨네요.
한 가지 수정할 사항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굉천님의 5054의 타임온리 데이트 버전은 Ref. 5053 아닌지요? ^^
5035는 애뉴얼캘린더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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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4 09:14
아.. 오타까지 잡아주시고 ㅠㅠ
그만큼 제 글을 정독해주셨다는 의미겠죠. 감사드립니다 (__)
사실 '완료' 버튼 누른 이후에도 스스로 몇번 읽으면서 오타 몇개는 수정했는데
저 레퍼런스는 끝까지 안보였네요 ^^;
솔직히 지금도 번호들이 좀 헷갈리긴 합니다ㅋㅋ 게다가 저 번호가 나온 레퍼런스 넘버 중 하나가
제가 자주 쓰는 네자리 번호와 너무 비슷해서 한층 더 혼란스럽기도 하다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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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젯
2019.07.14 15:00
감사합니다.
굉천님의 글은 항상 정독하고 있습니다. ^^
자주 쓰시는 번호라면 더더욱 헷갈리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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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ris
2019.07.14 22:16
광천님.. 또 이런 고급진 포스팅을 올려주시다니!! 반칙입니다.
크.. 240 무브 뽕 제대로 맞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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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4 22:19
ㄸㅋ님이 옆동네에서 들려주셨던 5712를 통한 240 사용담도 5054 선택시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새삼 감사드립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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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ris
2019.07.14 22:21
굉천님이 가지고 계신 240 무브의 로터 데코가, 제가 사용했던 240 무브의 로터 데코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번 올려주신 로터 사진보고 완전 뿅 갔습니다.
사실 이 다이얼 배열은 노틸러스보다는 지금 가지고 계신 5054에 가장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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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4 22:27
무브 전체적으로 옛날 버전이다보니, 파텍씰 대신 제네바씰이 있다던가 등등의 차이가 있었던것 같고
로터의 경우는 최근에는 생략되고 있는 22k 음각이 새겨져 있다는 차이만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 외에 혹시 또 알고계신 차이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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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ris
2019.07.14 22:33
제가 가지고있었던 5712의 240 무브 로터 데코는 보는 방향에 무관하게 반짝이는 데코였습니다.
굉천님의 5054 240 무브 로터 데코는 그렇지 않아보입니다. 브러쉬가 너무 고급지게 잘보인다고 해야할까요?
적어도 제 240은 빛반사가 너무 잘되서 브러쉬 결을 잘 볼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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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4 22:43
앙증맞은 것이 여기저기서 반짝여도 충분히 이쁠 것 같긴 하지만ㅎㅎ 제 로터의 느낌을 칭찬해주시니 감사하네요ㅋ 전에 말씀해주신대로 와인딩효율도 유명한 풀로터 무브들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풀와인딩 유지하는데 부족함 없을정도로 충분히 훌륭한것 같아서 매우 만족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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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타곤
2019.07.15 09:57
역시 깊은 내공수위가 느껴집니다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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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천
2019.07.15 12:09
여기저기서 구글링한걸 긁어모았을 뿐입니다^^; 감사합시다 반타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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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2019.07.22 20:21
멋진 사진과 글 잘 감상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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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
2019.07.25 20:25
역시 굉천님 포스팅은 보는 맛이 있습니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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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추
2019.09.30 23:04
정보글은 항상 유익하네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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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3on
2020.05.26 12:19
굉천님의 포스팅을 너무 늦게 알아보았네요 ㅠ
재미나면서도 의미 있는 글에 추천 드리고 갑니다~^^